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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an 16. 2018

나는 가문비나무일까?

편집하는 마음 (1)

햇빛 잘 드는 창과 책상, 노트북 한 권이 전부지만, 책을 만들고 읽으며 아직 조금은 남은 삶을 버텨내고 있다. 누런 귤 봉투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때때로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뛰어난 편집자라서 대우 받으며 특정 분야에만 매진할 수 있다면 다르겠지만, 혼자서 꾸려가야 하는 입장에 서면 한 분야만 판다는 일이 쉽지 않다. 폼 잡으려 일하는 것도 아니고 간판이라도 제대로 선 이후에야 내 고집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시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공부라고 표현하니 쑥스럽다. 이것저것 두서없이 지식을 쌓아가는 일도 공부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식성 좋은 중학생처럼 일단 몸과 마음에 채워 넣는다. 500쪽이 넘는 이르는 기타 제조관련 책을 주말동안 뒤적이는 것도 그래서 시작했다. 여건만 된다면 한 번 도전해봄직도 하지만 그럴 처지는 아니고 기본 상식이라도 얻으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르는 용어가 태반이지만 음악 이전의 소리를 위한 고민을 한 사람들과 그 생각하는 마음에 휩쓸려 들어간 나무들의 이야기가 건조한 문체와는 달리 흥미진진하다. 밥 벌어 먹는 일과 관련 없는 독서는 왜이리 자주 재미를 선사하는지.    


  고급 클래식 기타의 전판(기타의 앞판, 상판 혹은 음향판, 진동판이라고도 부른다)은 스프루스(spruce)라고 불리는 가문비나무가 많이 쓰인다고 한다. 전판의 기타는 제작된 후 수년 정도 연주를 많이 해 줄수록 소리가 더 트이는데 이는 상급 스프루스 전판의 특징 중 하나인 수질선과 관련이 있다. 수질선이란 나뭇결에 직각 방향으로 자라는 섬유질을 말한다. 녹말과 수지를 순환시키는 것이지만 주요 역할이지만 전판에서 수질선은 나뭇결을 이루는 긴 섬유들 간의 통로가 되어 음질을 개선시티는 효과를 담당한다고 한다. 수질선이 결정체화가 빨라 횡 방향의 진동 전달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전판에는 스프루스말고 시더(cedar, 삼나무로 번역되곤 하지만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도 많이 쓰이는데 수질선이 약간 보이기는 하지만 뚜렷하지 않아, 스프루스만큼 소리에 중요한 역할은 하지 못한다고 한다. 스프루스는 시더에 비해 수지樹脂 성분이 많아서 소리가 트이는 데 시일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수질선은 시일이 경과될수록 더욱 더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고 계속해서 연주를 하면 이 수지들이 진동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 그 결과 전판의 반응성이 좋아져 음질이 무르익는다고 한다. 독일 스프루스는 소리가 트이는 데 대략 1~2년 정도 걸리고, 그 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소리가 개량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좋지 않은 기타도 시일이 지나면 소리가 좋아진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 시더는 스프루스에 비해 시간이 경과되어도 소리가 더 좋아지지는 않는데 처음부터 반응성이 좋아서 큰 음량과 트인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지만 책이 갖는 무게는 그 너머에 있다. 팔릴 책과 만들어야 할 책, 혹은 만들고 싶은 책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에 대한 논평은 주제넘은 짓이다. 찐쌀 같은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저 매일 노력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좋은 목재가 잘 건조되고 연주자의 끊임없는 연주가 더해져야 아름다운 소리를 지니게 되듯이, 가문비나무이기를 상상하며 열심히 두드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 편집하는 마음은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그저 나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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