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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Feb 23. 2020

절망하는 시대를 말하다

영화 <1917>에 대한 짧은 시선

상파뉴 지역의 참호. 출처: 전쟁 역사가이자 TV 작가인 폴 리드의 1차 세계대전 유적지 작업을 소개하는 사이트 ww1revisited(ww1revisited.com)


병사가 묻는다. 정말 우리 둘만 가는 게 맞느냐고.

장군은 물끄러미 쳐다보다 대답한다. 


“지옥으로 가든 왕좌로 가든, 홀로 가는 자가 가장 빠른 법이지.(Down to Gehenna or up to the throne, He travels fastest who travels alone)”     


영화가 관객에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의 시 <The Winners>를 인용한, 이 중의적인 대사 속에 모두 들어있다.적의 위장 철수에 속아 공격을 감행하지 않도록, 최전선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 무조건 주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 동행하는 친구(동료)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가족(에 대한 생각)도 발길을 붙잡는 존재일 뿐이다. 단, 희망을 바라는 인간이기보다는 탐욕에 복종해야 하는 병사의 의무에 한해서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란 뜻의 ‘게 힌놈’을 헬라어로 음역한 게헨나(Gehenna)는 예루살렘 서남쪽의 골짜기로 자녀를 불에 태워 희생 제물로 드리는 인신 제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구약 성서에서 유다 왕 아하스와 므낫세가 우상 숭배를 위해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던 곳이다.     


“힌놈의 골짜기에서 분향하고……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대하 28:3) 

“또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대하 33:6)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고 키플링의 시도 단순히 지옥으로 변역되지만,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친 성서의 상황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국의 수많은 젊은 생명들을 죽음의 불꽃 속으로 밀어 넣은 바로 그 지점이다. 어린 병사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왕좌를 향해 빨리 달려가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가 된 현실을, 대사는 드러낸다.

* 러디어드 키플링은 <정글 북 The Jungle Book>(1894)을 비롯한 많은 단편소설을 쓴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19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7대양 The Seven Seas>(1896) <The Recessional>(1897) 등이 당시 대영제국주의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만년에는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시가 영화에 인용된 것은 이 같은 부분을 반영한 치밀한 계산으로 보인다.      


선택된 병사 톰 블레이크는 자신의 형이 공격을 앞둔 최전선에 있다는 이유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임무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동행하게 된 윌리엄 스코필드는 출발을 멈출 방법이 없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과 영국의 1,600명 병사들의 목숨을 살릴 희망이 된다. 탐욕이 희망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출처: 유니버설 공식홈페이지(www.universalpictures.com)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샘 멘데스(Sam Mendes) 감독의 영화 <1917>은 평범하다. 따로 촬영한 컷들을 교묘하게 이어붙여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게 하는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촬영기법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없어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처럼 독일이라는 악을 선정하고 편을 갈라 진행하지도, 극적 사건도 진행되지 않는 참호전의 지루한 소모전이 사람을 병들게 만든 전쟁이다. 그 답답한 속내를 극적 재미로 치장하는 영화적 방식이 오히려 시대와 현실을 똑바로 보여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샘 멘데스와 그의 영화는 전쟁이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며, 스펙터클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모한 걸음에 나선 블레이크는 자신 때문에 엉겁결에 따라 나선 스코필드에게 묻는다. “성공하면 훈장을 받을 수 있을까?” 스코필드는 받을 거라고 답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전 전투에서 자신이 받은 훈장은 버렸다. 아니 프랑스 대위가 건넨 와인 한 병과 바꿔버렸다. 스코필드는 1년 전 1916년 독일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살육이 벌어진 솜 전투(First Battle of the Somme)에서 살아 돌아 온 병사다.(작전 개시 당일, 영국 육군에서만 5만 8천 명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2km 앞으로 전진 했는데 이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 육군 42만 명, 프랑스 육군 20만 명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싸웠던 독일 육군의 인명 손실은 50만~65만 명가량이었다) 스코필드는 그 전투에서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훈장은 그저 쇳조각이었을 뿐. 갈증과 두려움을 삭여줄 와인 한 병이 더 간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선을 사이에 둔 연합군 병사와 독일군 병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미소 띤 얼굴로 얘기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담배와 커피와 포도주를 교환했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이 바르타스 상병)

_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제1권 中.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랑그독-루시옹 네 곳과 보르도의 포도밭 지역인 지롱드에서 주로 와인을 징발했다. 주요한 와인시장이자 1914부터 전선과 가까웠던 프랑스 북동부의 인구 중심지들에 철도를 통해 공급하기에도 좋았다. 연간 1만 리터 이상을 생산하는 생산자들은 고정된 가격에 자신들의 생산량 중 3분의 1을 넘겨야 했다.      


이전 글 <전장의 애환을 달래준 와인, 피나르(https://brunch.co.kr/@penwrite/53)>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랑스 군에게 와인은 필수품이었다. 최전선에 있는 프랑스 군은 1917년 12억 리터, 1918년에는 15억 리터의 와인을 소비했다. 전쟁 마지막 해였던 1918년에 소비한 와인은 전년도 생산량의 5분의 2에 해당한다. 수천대의 탱크가 실린 기차를 통해 전쟁지역으로 와인이 배달됐고, 최전선에 가까이 가기 전 트럭과 말을 통해 225~500리터짜리 배럴로 옮겨졌다. 참호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양동이로 나눠주었다. 스코필드과 훈장과 맞바꾼 와인은 적어도 병에 든 와인이었으니 품질이 좋은 와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프랑스의 와인 산업을 많이 망가뜨렸다. 대포와 군대의 이동이 일부 포도밭을 파괴했지만 포도밭이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곳에서도 포도나무를 돌볼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말도 비료나 다른 필수품들도 없었다. 상파뉴의 많은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나고도 포도밭 상황을 재정비하는데 시간이 지체됐는데 나라 전체에 산재한 불발탄과 토양 속에 독성물질을 유출시키는 화학탄의 위험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파뉴에서 전쟁 기간 생산된 첫 빈티지가 20세기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평가되는데 전쟁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졌다는 이유보다는 목숨이 위태로운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공격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전선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임무 완수를 위해 숨이 멎을 듯 뛰어 매킨지 대령 앞에 선다. 그의 손에는 총도 없고, 옆에는 동료 블레이크도 없었다. 오직 장군의 편지 한 장만 들려 있다. 편지를 읽고 주저하던 대령은 공격 중지를 명령한다.     

“오늘은 끝이지만, 다음 주에 장군은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낼 거야. 새벽에 공격하라고.”     


그렇게 목숨을 건 전령은 비록 오늘은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지만, 일주일 후 공격 명령에 수천 명이 다시 죽게 될 운명을 멈추지는 못할 것이다. “희망은 위험한 것(Hope is a dangerous thing)”이라는 매킨지 대령의 읊조림처럼. 그렇게 모두 940만 명이 전사했고 1540만 명이 부상을 당하고야 전쟁은 끝이 났다. 독일군 1300만 명 참전에 200만명 사망, 프랑스군 780만 명 참전에 130만 명 사망, 영국군 570만 명 참전에 70만 명 사망. 희망을 가장한 탐욕에 쓰러진 생명의 숫자다.      


누군가는 절망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그들에게 가짜 희망을 주입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어쩌면 희망은 스코필드가 아내와 딸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댄 참나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 높은 곳까지 자랐으나 지금은 회백색의 무표정한 얼굴로 앙상한 가지만 드리운 나무. 그래도 꼭대기의 이파리는 바람에 흔들리며 아직 살아있음을 새들에게 알린다.      


백 년 전의 전쟁은 지금도 유효하다.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엄청난 무기들의 시험대가 되었지만, 정작 말단의 병사들은 땅 밑으로 파 들어간 참호 속에서 버티는 일 외에는 할 것이 없던 절망의 상황. AI와 자본, 그리고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을 떠들어대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시장이라는 지평선에서 그저 빨리 달릴 것을 주문하는 지금의 상황은 많이 그리 다르지 않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병사들의 기대와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노동자들의 바람이 미세먼지처럼 흐릿한 오늘이다.   

  

내 앞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Before me there were no created things,)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Only eteme, and I etemal last.)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All hope abandon, ye who enter in!)     

_단테 『신곡』 <지옥편> 3곡 中  


#1917 #샘멘데스 #아카데미 #1차세계대전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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