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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y 02. 2020

내 필요는 내가 결정한다

열네 번 째 이야기_나무공방에서 보내는 반나절

     


인간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 육체적 성장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영양소를 공급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갖춰야 할 신체기관들이 완성되는 시기가 있다. 사람으로 살아갈 준비가 모두 이뤄졌다는 뜻이다. 2010년 네이처지에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180개의 위치에서 수백 개의 유전자 돌연변이가 성인의 키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혀졌다. 그 마저도 80%는 유전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단련하는 정도에 따라 상태가 유지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골리앗이 될 수도 헐크가 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잘났든 못났든 신체가 탁월하든 그렇지 못하든 부모를 탓할 수는 있어도 아이가 더 어떻게 해볼 수는 없다. 그리고 비만을 우리는 성장이라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성장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서 육체의 성장이 멈춘 후에도 지식과 사고라는 힘을 통해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물론 유아기 때의 정신 수준에서 멈추는 경우도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이 마저도 어느 시점이 오면 더 이상 어려운 때가 오고 퇴보하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인간은 끝없이 성장할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로 저성장과 마이너스 성장을 염려하는 주장이 넘쳐난다.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에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아, 그래서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나 기업이나 소위 엘리트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어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덜 쓰고 덜 기대하며 살아도 되겠지만, 그래서는 더 많은 이익으로만 굴러가는 거대 자본과 기업, 거기에 편승한 관료들이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의 성장을 이야기할 뿐이다. 더 좋은 음식과 약, 도구와 문화라는 이름의 소비용품을 갖추지 않으면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할 것처럼 부추기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는 이반 일리치의 분석은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다.      


한 쪽에서는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반대로 코로나 이후 자급자족과 스스로 필요한 것을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도 많아지고 있다. 텃밭을 가꾸고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쓴다거나 소비해야할 양을 줄이거나 하는 등의 일 말이다. 모든 것을 다국적 기업과 남의 손에 내 맡기고 카드에 의존해 살아가는 삶이 더 이상 안전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코로나는 일깨워 주었다. 그러고 보면 소비만 성장했지 우리 삶의 체력은 오히려 영양부족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보다 균형 있는 건강이다.     


가끔 소규모 공방이 많아지면 주변의 삶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물건 값으로 따지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1000원 숍과 경쟁할 곳은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것저것 사다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쉽게 버려지고 그것이 생산된 이유와 방법에 대한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다. 낭비하는 삶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작은 공방은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기술을 익혀 자신이 직접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기쁨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내가 일주일에 한 번 나무공방을 찾아, 작든 크든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은 책꽂이 하나를 만드는 작업을 통해 얻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내가 사용하는 나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자르고 잇고 연결하는 수많은 방법 중 무엇을 택할지, 해로운 화약물질을 멀리하는 방식이 환경에 어떤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을지, 욕망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시간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맑게 하는지 등. 가구가 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나무가 공생하는 과정임을 알려주는 ‘공장’은 없다. 대신 공방이 많아지고 그곳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욕망의 온도를 1도쯤 낮추고, 지구는 10년쯤 더 오래 건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공방의 물건이 적당히 팔려나가고 자주 찾아오는 이들도 있어 공방이 문을 닫지 않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자리를 비운 공방 사장님을 대신해 반나절, 가게를 보며 보냈다. 만들다 만 짜맞춤 상자의 표면을 다듬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가롭게 공방이나 운영하면 좋겠다는 말들을 한다. 공방은 생활하며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곳이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니다. 적게 욕망하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는 사람의 공간이다. 혹여 돈이 많아 이런 공간을 꾸며놓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이런 삶을 결국 지겨워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목수의 고된 노동과 아이디어, 기술, 그리고 목재의 아름다움은 고려하지 않고, 돈의 수량으로만 사물을 판단하며 값이 비싸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오늘도 스쳐간다. 사람들에겐 아직 공장이 더 가깝고, 손과 발이 느끼는 질감보다 혀 안의 감촉이 더 즐겁다. 햇살이 뜨겁다. 여름이 오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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