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으로 간밤의 여러 가지 소식들을 체크한다.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고, 출근 준비를 마치면 회사로 향하는 길 버스에서도 쉴 새 없이 귀에는 헤드폰을 끼고 핸드폰을 본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해 모니터 앞에 앉아 퇴근할 때까지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퇴근길에 버스에서 다시 핸드폰을 보며 집에 간다. 그리곤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잠이 든다.
이런 생활의 연속에 소위 ‘마인드풀’한 삶을 위해 돈을 들여 요가와 명상수업을 들었다. 아, 나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마인드풀’한 현대인이라는 자아도취와 함께. 그래도 이렇게 돈을 들여 요가와 명상이라도 한 덕분에 잠자는 시간 외에 이 작은 기계들의 화면에서 해방되는 시간을 하루에 1시간 정도는 확보할 수 있었다. 작은 기계들에게서 해방하는 시간조차 돈 주고 산다 생각이 드는 날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며 분주해진 어느 봄날, 스크린 타임을 확인하고서는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스크린 타임이 절반 이상이 준 것이다. 흙을 만지고, 풀을 뽑을 때는 핸드폰을 보려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단짝이라 생각하는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원 가꾸기를 ‘노동을 가장한 휴식, 상상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리는 명상’이라며, 글쓰기를 하다가 눈이 아프고 머리가 무거워지면 도망치는 안식처가 바로 정원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뒤로하고 일찍이 도시를 떠나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며 평생 정원을 가꾸었다.
헤세는 글쓰기로 도망치는 안식처가 정원이었다면, 나에게는 이 작은 기계들에게서 도망치는 안식처가 나의 정원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고, 흙을 만지고 있다 보면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생각들이 펼쳐진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등산을 하던 어느 날, 쉴 새 없이 나무와 돌과 흙을 만지며 등산을 하는 친구에게 왜 그렇게 뭘 자꾸 만져대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야. 그래서 손에 닿는 촉감이 대부분 다 비슷해. 그런 물건들만 손에 닿고 살다 보면 어느새 손끝에서 미세한 감각들을 점점 더 느끼기가 어려워져. 그런데 자연에서 온 것들은 어느 하나도 같은 촉감을 가진 게 없어.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라도 마른 정도에 따라서도 촉감들이 다르고”
너무 맞는 말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표면이 매끈한 것들만 손에 닿으며 살다 보니, 되려 그런 촉감이 아닌 것들을 만질 때에는 놀라곤 한다. 오징어를 손질하다가 그 미끌거리고 물컹거리는 그 감촉에 어찌나 놀랐던지.
흙과 나무들을 매일 만지니 손끝에 죽어있던 감각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습도의 정도에 따라 다른 흙의 감촉, 목이 마른 식물들의 신호들이 조금씩 손끝에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나는 손끝의 감각들과 함께 초록을 바라보는 눈과 머릿속은 한결 맑아지고 있다.
물먹은 나무토막처럼 무겁기만 하고, 물 한 방울도 더는 담을 수 없이 꽉 차있던 항아리 같던 몸과 마음이 흙을 만지며 가벼워지고 숨 쉴 공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공간이 생기니 이제서야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창조할 공간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 그만하고 싶다' 라는 마음에서 '무엇부터 해볼까' 라는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