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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Aug 14. 2024

각자의 모양과 시간대로 피우는 꽃들

서른 중반쯤이 넘어가며 비슷비슷했던 모양의 친구나 지인들의 새로운 소식들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삶의 모습들이 다른 모양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는 애가 벌써 둘이래, 누구는 이번에 어디로 이직했고 억대 연봉으로 승진했대, 누구는 강남에 아파트를 물려받았대.’ 등등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누군가의 소식들은 친구의 친구로부터 혹은 SNS를 통해 끊임없이 전달이 되었고, 인생의 과업을 하나둘 해나가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누군가의 소식은 어느 연예인이나 재벌이야기와는 다른 감도로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곤 했다.


그런 소식들이 하나둘 들릴 때면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연고도 없는 부산의 작은 섬마을로 내려와 낡은 집에 정원이나 가꾸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혹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건 아닐까? 계속 안정된 일을 하며 더 달려야 했던 게 아닐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른 나이에 100여 명에 가까운 팀을 이끄는 디렉터로 자리를 잡아갈 때쯤이었다. 두 달 동안 이유 없는 기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첨엔 가벼운 알레르기인 줄 알았으나 기침은 멈출 줄을 몰랐고, 결핵검사와 폐조직검사까지 했지만 이유는 불분명했다. 그냥 폐가 기형인 것 같다는 진단밖에.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기침은 멈췄으나 여전히 6개월에 한 번씩 계속해서 추적검사를 받고 있다.


그쯤 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 땀에 뒤범벅되며 내려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이런 게 공황장애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에 많게는 10개가 넘는 미팅을 소화하며, 때로는 밥 먹는 시간도 화장실 가는 시간도 부족할 정도의 매일매일이 소진이 되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바다가 지척에 있는 마을의 오래된 집 그리고 작은 정원에서 나만의 템포를 찾겠다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왔다. 새로운 템포에 몸과 마음이 맞춰지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린 템포의 일상은 생각처럼 여유롭고 편안하기보다는 되려 ‘남들은 다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찾아와도 나의 정원에는 봄이 만발해 가고 있다. 꽃과 나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워갔다.



정원에 심긴 세 그루 델피늄 중에 가장 약해 보였던 델피늄그루가 어느 날 키가 쑥 자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리고 양귀비 다섯 그루 중 중 봄이 짙어가도 유일하게 꽃몽우리가 보이지 않아 안쓰러워했던 아이가 어느 날 아침 불쑥 세 송이의 꽃 몽우리를 맺으며 기지개를 활짝 켜기도 했다. 겉으로는 가장 약해 보이던, 가장 느려 보이던 델피늄과 양귀비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 위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꽃들의 모습은 어떤가? 어느 하나도 같은 색, 같은 모양인 것들이 없다. 이 꽃은 이 꽃대로, 저 꽃은 저 꽃대로 그저 각자만의 모양과 시간대로 꽃을 피울 뿐. 다른 모양을 시기하거나 탐하지도, 내 모습을 바꾸지도 않는다. 


정원을 가꾸며 대학시절 은사인 김누리 교수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대학 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유일한 나라, 대학을 취업률로 평가하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대학이라는, 취업이라는, 부자라는 정해진 정답만을 쫓아 달리게 만드는 시스템 안에서 어쩜 지금까지 내가 쫓아온 삶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 정해준 정답을 찾아오는 과정이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꽃과 나무들은 옆에 함께 서있는 아이들을 보고 그 모양을 흉내내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그냥 나는 나로 존재할 뿐이다. 계절에 맞춰 ‘때'는 있을지언정 나의 속도대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멀리 내다보며 나만의 모양과 템포를 찾고 있는 나도 천천히 꽃몽우리를 맺은 그 꽃들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에서 느리게 시간을 보내며 배운 그 단순한 진리가 너무 큰 울림과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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