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난 2월의 어느 날. 바람 끝이 뭉툭해지고 보드라워진다 느낄 때쯤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듯 웅크린 몸과 마음을 펴고 정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오고 약 6개월 만이었다.
네평 남짓한 버려진 작은 정원에 발을 디디니 무성하게 여기저기 가지를 뻗은 대봉나무, 단감나무와 내팽개쳐진 수국 한그루가 우울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머릿속에는 만발한 꽃들로 가득 찬 화려한 정원의 모습이 가득하지만, 내 눈앞에는 황량하고 비어있는 땅만 이 있을뿐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막막하던 찰나, 정원 한편에 버려져 있는 수국나무에 벌써 꽃눈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수국나무에도 봄이 오고 있었네'하며 꽃봉오리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싱싱한 새 가지들에서만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힘이 없고 오래된 썩은 가지들에서는 꽃대가 올라오고 있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라며 장갑을 끼고 전정가위를 가져와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가지치기라곤 하지만 생명이 없는 가지들은 털갈이를 하는 동물의 털처럼 힘을 줄 필요도 없이 힘없이 쑥쑥 뽑혔다. 그렇게 한참을 털갈이 도와주듯 생명력을 잃은 가지들을 다 털어내주고 나니 버려져있던 수국이 새 생명을 얻은 듯 활기차 보였다.
고맙다며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수국에 용기를 얻어, 이번엔 전정가위를 들고 대봉나무와 단감나무로 향했다. 더 곧고 높게 뻗어 나가며 햇빛을 맘껏 받을 수 있도록 중간중간 어지럽게 난 가지들을 하나 둘 정리해 주었다.
가지치기를 다 끝내고 수북이 쌓여있는 가지들을 바라보니, 내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너무 많은 곁가지들 때문에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고 힘에 부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정말로 집중해야 하는 일들, 정말로 시간과 애정을 쏟아야 하는 관계들, 사실 머리로는 알지만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하며, 꽃을 피우지 못할 가지 들을 스스로 정리하는 나무를 보며 그 지혜에 감탄했다. 가지치기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큰 도화지를 꺼내 눈에 보이게 내 삶이라는 나무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현재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많은 키워드들도 나뭇가지로 그렸다.
나 라는 나무에 뻗은 건강, 행복, 가족이라는 큰 가지들. 건강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남기고 모두 가지치기를 했다.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내 삶과 생각에도 가지치기를 하고 나니 내 삶이라는 나무도 정원의 내팽겨쳐져있던 수국나무와 감나무들처럼 한결 가볍고 활기차 보인다.
그 후로도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다 싶을 때는 스스로 가지치기를 해본다. 줄어들지 않던 투두 리스트, 위시 리스트 들도 정말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모두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긴 머리카락을 자른 듯, 불필요한 지방덩어리가 쑥 빠져나간 듯.
무언가가 굉장히 많고 복잡한것 같았는데 막상 적고 보니 생각보다 적고 별것 아닐 때도 많다. 또, 불필요한 생각들이나 일들을 쓸데없이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삶에도 가지치기를 하다 보면 흐릿했던 것들이 명확해진다. 무엇이 진짜로 나에게 필요한지를.
한결 가벼워진 수국나무에 봄 빛을 받아 반짝이는 봉우리들이 어떤 꽃들을 피워낼지 기대가 되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