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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Aug 23. 2024

긴 장마와 슬럼프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반짝이는 햇살아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소금기 머금은 몸으로 해변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이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여름을 맞이하기 전엔 긴 장마가 먼저 찾아온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선, 가장 싫어하는 장마를 꼭 보내야 한다니 무엇이든 그저 쉽게 주어지는 건 없다.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 오고 처음 맞이한 장마시즌은 유독 힘들었고 장마를 더 싫어하게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의 장마는 장마 내내 해무에 쌓여 마치 구름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한 달 가까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몸도 마음도 비에 젖은 나무토막처럼 무거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손님공간으로 정리를 미뤄둔 2층엔 옥상에서 물이 스며들어 천장에 곰팡이까지 생겼다. 옥상 방수공사를 한지 얼마 안 됐다던 전 집주인의 이야기만 철석같이 믿고 장마대비를 제대로 안 한 탓이었다. 게다가 봄에 만들어두었던 정원의 나무데크는 관리를 잘못한 탓인지 나무가 물을 머금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주택관리를 제대로 모르고 서툴렀던 나와 남편은 첫 장마에 완패를 당했고,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투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치지 않는 비에 정원은 꽃들은 다 쓰러지고, 이쯤 되고 보니 살면서 가장 큰 실수가 바로 이 섬으로,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장마와 함께 지난봄 정원에서 누렸던 행복한 시간들은 금세 잊혔고, 길고 어두운 터널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내 삶에서도 이런 장마 같은 시간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부모님 덕에 꽤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가서는 해외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어학자격을 준비하고 있던 때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급작스레 귀국을 해야 했다.


그렇게 서둘러 짐을 싸고 돌아와서는 우리 가족이 함께 짓고 오랜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어린 집을 떠나야 했고, 몸과 마음이 병든 엄마를 간호를 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친오빠는 본인 등록금을 빼 내 대학교에 마지막 학기 등록금으로 사용하라며 주었고, 이런저런 알바를 하며 겨우 졸업은 하게 되었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며 취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당장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당장 시작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멀리 내다보기는커녕 당장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 오랜 시간에도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모든 것이 다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고, 긴 겨울 끝에 봄이 온다는 말은 그저 상투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들은 결국 자연의 섭리였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사도 결국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지루하기만 한 장마도 언젠가는 그치고, 끝을 모르는 슬픔과 상처의 시간들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장마가 그치고 해가 뜬날 정원으로 나가 장마동안 쓰러진 꽃과 나무들을 일으켜 세워 지지대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옥상 방수도 새로 꼼꼼히 하고, 곰팡이 핀 2층도 손을 보았다.


또다시 몇 번이고 찾아올 장마겠지만, 다음 장마는 조금 더 단단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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