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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Feb 03. 2017

봄을 기다리며

남산의 가을과 겨울을 추억한다

모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열병 같은 연애가 끝난 듯이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봄은 더 느낄래. 다음 여름은 더 뜨거울래.' 하면서 말이다. 모든 계절의 끝에 아쉬움이 참 많이 남지만 유독 겨울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입춘날 태어나 그런지 겨울의 끝은 늘 '정말 지릿하게 긴 겨울, 제발 좀 끝나버려.' 하며 악담을 몇 번이나 퍼붓는지 모른다. 그렇게 악담을 몇 번 퍼붓고 나면 겨울의 저주처럼 꼭 감기 몸살이 나거나 지릿한 겨울에 지쳐 기어코 며칠 앓고야 만다.


길고 긴 겨울에 지치는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미국 고향집에 잠시 휴가를 떠난 짝에게서 오늘(2월 2일)이 그라운드 호그(Ground Hog Day)라 미국의 어느 TV 채널에서는 24시간 빌 머레이 주연의 '그라운드 호그 데이' 영화를 24시간 방영 중이라 했다. 그라운드 호그 데이를 우리나라 절기로 치면 '경칩' 정도가 될까? 미국에서 마멋(Woodchuck 혹은 groundhog)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날로 사람들이 그라운드호그를 가지고 겨울이 얼마나 남았나를 점치는 날이다.


겨우내 따뜻한 땅굴 속에서 지내던 그라운드호그는 2월이 되어, '이쯤이면 봄이 되었나 어디 한번 보자'라며 땅굴 속에서 고개를 쏙 내민다. 이때 날씨가 흐리면 그라운드호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어 그 해에는 봄이 빨리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날 햇빛이 쨍하고 비치게 되면 그라운드호그는 땅굴에서 나와 자기의 시커먼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군'하며 다시 땅굴 속으로 쏙 숨게 된다. 결국 그라운드호그 데이에 해가 나고 맑은 날이면 그로부터 6주간 겨울이 지속된다 믿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따뜻한 봄이 빨리 찾아오길 기다리나 보다.


물론 서양의 풍습이지만 2월 2일 서울은 유난히 맑고 따뜻하여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이러다 지루한 겨울이 6주나 더 계속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릿한 겨울에도 크리스마스며, 함박눈이 내리던 날, 적당한 아쉬움과 새로운 기대로 찬 한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 등 기억하고 싶은 날들이 많지만 이제는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 같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의 남산
함박눈이 오던 날 신이나게 남산을 걷고 또 걸었다


산책나온 동네 강아지
눈내리는 날엔 웬지 라멘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눈이 내린 다음날. 눈덮인 지붕사이로 솟아 있는 해가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


남산자락 아래에 산지 벌써 7년 차다. 서울살이 4년 차쯤 되었을 때 즈음 매일 오 가는 길 나무 하나 볼 수 없는 삭막한 서울살이에 지치던 와중 남산자락에 있는 동네에 처음 와보게 되었고, 그 순간 이후로 산신령이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남산을 떠날 줄을 모르고 살고 있다. 어디 먼 곳에 갔다가도 시야에 남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집에 왔구나'하는 안도감이 들곤 한다.


남산에 살아 가장 좋은 점은 매일매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인데, 퇴근하는 길 하루 종일 찌든 느낌이 들다가도 남산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내려 크게 쉼 호흡하는 순간 느껴지는 계절의 냄새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이다. 남산에 산다는 것은 드라마의 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은 추억이 된다.


특히나 청명한 하늘 아래 곱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가을의 남산은 서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금잔디>, <진달래 꽃> 등으로 유명한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김소월의 이름을 따 '소월길' 이름 붙인 이 길을 가만가만히 걷고 있다 보면 이렇게 예쁜 이름을 지어준 서울시의 어느 공무원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진다.


경리단길 중턱쯤에서 바라본 남산
가을걷이가 한창이신 동네 어르신들


입춘을 앞둔 어느 날, 또 다시 한계절을 떠나 보낼 준비를 마치고선 소월길을 걸어본다.

다가 올 눈부신 봄도 여름도 우리 모두 풍성하기를.


이제 정말로 안녕,

겨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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