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도 흘러가는 시간
8월의 첫날은 울진에서 시작했다. 눈뜨자마자 엄마 친구가 새벽녘 바다에서 잡아온 백합국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는 엄마의 어린 시절 추억이 쌓여있는 월송정을 산책했다.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가 참으로 낯설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한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
월송정을 떠나 후포 쪽에 있는 전복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빠와 새언니는 새언니 할머니 댁에 인사드리러 간다며 헤어지고 부모님과 나와 내짝은 7번 국도를 타고 포항 이모네로 왔다.
고등학교 시절 1년 동안 지내기도 했었던 이모네는 마음의 고향 같지만 그에 못지않게 마음의 빚이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빚을 갚기는커녕, 계속해서 이모에게도 받고만 있다. 가게에 아이스크림을 만들 과일도 자주 보내주시는데, 이날도 찐 쌀이며, 옥수수며, 야채며 한 가득을 받아왔다. 점심을 먹고 서울로 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뱃속에 조카까지 일곱으로 늘어난 가족들과 휴가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준비하는 밤. 참 배부르고 참 따뜻했다.
8월 첫째 토요일은 회사에 이벤트가 있어 하루 종일 서촌 대림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라 가게가 바쁘진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아주 오랜만에 주말을 가게가 아닌 곳에서 오롯이 보낼 수 있었어서 내심 좋기도 했다.
점심으로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국수를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애정 하는 서촌의 빈티지 샵에서 여름 원피스를 여러 벌 샀다. 서촌에 있는 구루루라는 빈티지 샵에서 샀던 원피스들은 유난히 몸도 편하고, 입을 때마다 주위에서 잘 어울린다고들 칭찬을 많이 들었다. 올여름 쇼핑을 하지 않았던 이유로 원피스를 여러 벌 구매했다.
그리고 8월에는 <어른의 맛>이라는 너무 좋은 책을 만났는데, 읽는 내내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감각들이 떠올랐다. 너무 좋아서 주변 친구들에게도 몇몇 선물을 하거나 추천을 했는데, 같은 책을 읽고선 다른 감상평을 들려주는 게 꽤 재밌었던지라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생기면 주변에 가끔 선물을 해볼까 한다.
<“아, 나도 어른이 되었구나 느꼈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건 바로 엄마가 해 준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였어요.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맛. 어른에게는 혼자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흐느끼게 될 때가 있다.> -어른의 맛-
8월은 특별한 일 없이 회사, 가게, 운동, 집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냈다.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패턴들 속에서 건강한 음식들을 좀 더 잘 챙겨 먹으며 보냈던 한 달이었다. 술을 워낙에 좋아하는 지라 술을 안마실순 없지만, 한두 잔 적당한 술에 가장 건강한 안주를 곁들여 먹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밤은 친구 혜경이가 열정도에 오픈한 '커피반점'에 다녀왔다. 어머니가 대만 화교 셔서 대만식 음식과 곁들여진 선술집인데 낮에는 커피도 파는 재밌는 곳이다. 혜경이는 대학생 때 미디컴이라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는데, 철없는 대학생으로 만났던 혜경이는 먼저 결혼을 했고, 딸 승연이를 낳고, 이젠 어엿한 사장님까지 되었다. 어여쁜 여대생이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엄마 혹은 사장님이 되어가고 있다. 친구들이 소중해지는 이유는 우리들이 서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기 때문이 아닐까. 혜경이의 가족과 가게 모두 행복하길.
혜경이네 집들이에 갔을 때 어머니가 해주신 오향장육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혜경이네 커피 반점에 모든 메뉴도 정말 맛있었다. 조혜경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8월에 있었던 가장 큰 일중 하나는 드디어 결혼 비자를 신청한 것이다. 비자 신청 서류들을 준비하며 꽤 걱정을 많이 했었다. 우리의 결혼 관계를 증명할 페이퍼들과, 우리가 결혼해서 한국에서 재정적으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증명들이 필요한데 각종 서류들을 다 모으고 나니 그 페이퍼가 너무 두꺼워 짝꿍이 도스도프예스키 소설 한 권 분량은 되겠다며 웃었다.
비자를 신청하기로 한날,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스트레스를 대비해 최후의 만찬으로 그동안 함께 가고 싶었던 홍대 '더 비스트로'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고 갔음에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온라인에 써진데로 모든 서류를 구비했지만 또 더 많은 서류를 요구했다. 세무서로 이메일로 각종 서류들을 더 준비해서 결국 어플라이를 마쳤다. 그 와중에 짝꿍이 새로 발급받은 여권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하지 않았다며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 아무도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신고해야 한다 알려주지 않았다 하니 벌금을 30만 원에서 12만 원으로 디스카운트를 해줬는데, 비자 발급 비용 13만 원과 여권 벌금 12만 원. 돈도 돈이지만 잘못된 정보들, 효율적이지 않은 시스템. 하루 동안 관료주의의 폐해를 제대로 맛본 듯했다.
비자 신청을 마치고 나오며 장난 삼아 이렇게 많은 서류들과 프로세스가 필요하니 이혼은 하지 말자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너지 보충을 위해 집 근처 오랑 오랑 카페에서 에티오피아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집 앞 골목 어귀에 해 질녘 가을빛이 내려앉고 있다.
8월 말, 입추와 처서가 지나고부턴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하더니 퇴근길 햇빛에서도 가을이 왔음이 느껴졌다. 주말에 늘어지는 늦잠이나 데이트는 우리 둘에게 사치가 됐지만, 일 끝나고 함께하는 와인 한병의 호사와 같이 작은 것들에 더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가을이 되고 있음은 와인 술상 안주에 무화과가 등장한 것에도 알 수 있다. 가을이 되면 무화과는 늘 박스채로 쟁여두고 먹는데, 두도 막으로 툭 잘라 생으로 먹거나 와인과 즐길 때는 무화과 위로 블루치즈와 꿀을 사르르 얹어 먹으면 완벽하다. 거실의 문을 열어두고 바람을 맞으며 와인을 마시는 저녁은 지금 이만큼의 행복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게를 하다 보니 배우는 게 많다. 그중 하나는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손님들에게 돈만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인데. 단골분들께 가끔 소르베를 만들고 남은 과일을 드리면 다음에 오셔선 책을 주시기도 하고, 더 맛있는 과일 한 봉지를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손님들만의 인생 맛집 리스트를 공유받기도 한다. 어느 날은 스위스에서 여행 온 커플 손님에게 스위스산 초콜릿을 받았더랬다. 초콜릿을 곱게 녹여 먹으며 더 넓은 마음으로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곱씹어보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가게 손님이 본인의 인생 맛집이라고 소개해주신 당신 허브족발, 족발을 워낙에 좋아해서 친구들을 졸라 맛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약속을 잡은 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는데 강남에서 당산까지 한 시간 지하철을 타고 달려가 먹었다. 비 오는 날 퇴근길 한 시간 지하철을 타고 갈 만큼 맛있진 않았다. 그래도 족발을 먹고 친구들과 근처 스타벅스에서 문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떨고 그것도 아쉬워 같이 택시를 나눠 타고 오며 오랜만에 친구들과 찐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8월의 또 다른 좋은 일 하나는 스티키리키가 보그 매거진에 소개된 것이다. 실물보다 훨씬 더 예쁘게 잘 나온 듯하여 뿌듯했다. 매거진 한 권은 미국에 가족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8월의 마지막은 출장 러시로 보냈다. 30일엔 음성, 31일엔 부산-울산-경주. 출장이지만 좋은 날씨, 좋은 음식, 좋은 풍경들을 즐길 수 있어 감사했고, 경주에서 출장 일정을 마치고 가족들을 보러 오랜만에 대구에 들릴 수 있어 좋았다.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하며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끝을 향해가고 있음을 알린다. 그래도 올해는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하려고 했던 계획들, 하고 싶었던 것들을 미루지 않고 모두 다 했거나 현재 진행형에 있다. 그리고 8월의 끝날, 올해의 마지막 남은 위시리스트였던 수영을 드디어 등록했다.
그렇게 또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8월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