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9월에는 여유가 생겼다.
미뤄오던 것들을 시작할 수 있는 여유.
하늘을 한번 더 올려다볼 수 있는 여유.
친구와 커피를 한잔 더 마실 수 있는 여유.
오랫동안 못 보던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는 여유.
고장이 잦던 냉장고를 바꿀 수 있는 여유.
퇴근길 버스 몇 정 거장은 걸을 수 있는 여유.
사람들에게 한번 더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여유.
9월의 첫날은 오래된 친구와 남산을 산책하고, 목멱산방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내가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남산길은 계절이 한걸음 빨리 온다.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는 9월 첫날임에도 가을 냄새가 났다.
곧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겠지.
드디어 수영을 시작했다.
그간 정말 미루고 미루고 미뤄왔던 수영.
자라면서 10번이 넘는 여름방학을 울진에 있는 외할머니댁에서 보냈음에도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물속에서 느끼는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 흐른 지금 아직 키판을 잡고 자유형 호흡을 연습하는 단계이지만,
그래도 '시작'을 했다는 성취감과 '하면 된다'라는 믿음이 조금씩 싹을 트고 있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못하는걸 마음껏 못할 수 있는 소독약 냄새나는 수영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수영을 시작하고 열흘 뒤 또 미뤄오던 한 가지인 타투를 하게 됐다.
타투를 하고 나면 수영장을 한동안 가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는 게 함정이지만.
타투는 우려와는 달리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내 몸에 평생남을 무언가를 새긴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결심이나 각오가 필요할 것 같지만,
의외로 아무 생각도 고민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었던 걸 했다는 생각뿐.
집에 있던 오래된 냉장고가 몇 번이나 말썽을 부렸다.
2년 전 이사를 하며 칠판 페인트도 칠해주고 나름 새단장을 시켰음에도 10년이 넘은 세월을 이기진 못했다.
9월에 또 한 번 더 말썽을 부리게 되자 이참에 냉장고를 바꾸기로 결심을 했다.
나와 짝은 함께 살던 데로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어 딱히 혼수랄 것도
내 집 장만도 무엇도 없이 결혼을 했다.
냉장고 하나 산 게 뭐가 대수겠냐만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함께 장만한 물건이기도 하고,
그간 경제적 그리고 심적 여유가 없어 미뤄오던 오래된 냉장고를 바꾸게 됨은
우리에게 나름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귀엽게도 냉장고 장만을 자축하는 조촐한 와인파티도 벌였다.
계속해서 쾌청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던 9월,
셋째 주에는 10월에 있을 캠핑 페스티벌 협찬과 관련하여 몽산포로 출장을 다녀오게 됐다.
7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차도 아래로 파도가 부서지는 동해안 풍경은 익숙하다.
하지만 동쪽으로 너른 평야가 그리고 서쪽으론 바다가 펼쳐진 서해안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함께 간 팀원들과 주최 측 팀장님과 바다를 풍경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답사를 마쳤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평일 회사를 벗어나면 뭘 해도 다 신이난다는 것이다.
함께 갔던 팀원들과 바다에서 잔디밭에서 사진을 백만 번 찍으며 행복하다를 백만 번 외쳤다.
그리고 또 하나 미뤄오던 일, 가게 데크 보수공사를 마쳤다.
옆집 아저씨가 주차를 하시다 데크를 박아 파손된 채로 몇 주간을 방치해 뒀는데
비를 핑계로 미뤄오던 보수공사를 가뿐한 마음으로 마쳤다.
사실 그전 데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 데크를 마련하게 되어
a blessing in disguise(불행인 줄 알았으나 뜻밖의 행운)라며 내심 좋아하기도 했었다.
좋은 날씨는 건조한 회사생활에도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금방 지나가버리는 짧은 계절을 놓치기 않기 위해
회사 친구들과 점심엔 도산공원 피크닉이나 산책을 자주 즐겼다.
화가 나는 일도 숲 속 나무와 잔디밭에 파묻히면 모두 잊게 되는데,
일터 근처에 이렇게 작은 자연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또 다른 점심엔 멀리 도곡동까지 가서 가보고 싶었던 도시 서점에 들렀다가 쌀국수를 먹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낯선 동네 산책을 하는데 발길 닿는 곳곳마다 햇빛이 예쁘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런 날이면 과연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한다.
9월엔 오랜만에 얼굴을 본 이들도 많았다.
어느 평일 점심엔 계언 언니를 만나고 왔다.
언니는 9년 전 런던에서 잠깐 플랏 메이트로 만났는데, 나의 멘토 같은 존재이다.
언니를 자주 만나진 않지만 삶의 페이지가 바뀔 즈음 한 번씩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언니는 영원한 나의 지지대이자 믿는 구석과 도 같다.
종교도 믿지 않지만 살면서 나에게 그런 존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어느 좋은 저녁엔 전 회사 선배를 만났다.
살면서 진심으로 선배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몇이나 만날까.
선배는 선배란 말이 참 잘 어울린다.
늘 단정한 모습에 깔끔하게 열심히 업무 처리를 하고,
철없는 회사 생활을 하는 내게도 늘 따뜻하게 대해주던.
회사를 옮기고서도 일적으로 궁금한 일이 생기거나 할 땐 불쑥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배는 늘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답해줬다.
나는 선배처럼 좋은 선배가 될 순 없을 것 같다.
9월은 퇴근길마다 노을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을 지나오는 퇴근길 코스는 노을 구경에 최적화되어있는데,
(사실 이 길 때문에 출퇴근길이 조금 불편해도 이 동네에 계속 살고 있다)
퇴근길 버스에 내려 남산 공기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려다보는 서울풍경과 노을은
하루의 끝에 엄청난 위안을 준다.
다 괜찮아! 오늘도 잘했어. 라며
매일매일 관찰하다 보니 보랏빛, 핑크빛, 주황빛 등 그날 그날 노을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짐이 뚜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음을 가장 감사해야 할 일이다.
(팀장님 사랑합니다)
퇴근길 바람끝이 뾰족해진 어느 날 저녁에는
따끈한 어묵이 먹고 싶어 퇴근길에 어묵 두 개를 사 먹었다.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명가원 수제 어묵집은 밀가루 0%의 수제 어묵을 만들어 판매하시는데,
탱글한 생선살이 살아있는 어묵이 정말 일품이다.
서서 어묵을 먹고 있다 보면 익숙한 듯 지나가는 동네 꼬마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시는 사장님이 참으로 정겹다.
가게를 하면서부터 그 가게의 공간이나 제품뿐만 아니라
사장님들이나 점원들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금요일 오후의 외근,
강남역 뒤편에 위치한 카페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키가 큰 나무가 우거져 있는 정원이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왜 좋아 보이는 곳들은 모두 "외국 같다", "유럽 같다"로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행복을 더해주는 와인들과 마음의 양식을 채워 주는 9월의 책들.
좋아하는 것들 두 가지. 와인과 책을 두둑이 쌓아 놓고 나면 곳간이 가득 찬 부자가 된 기분이다.
우리 집의 곳간이 가득 차듯, 스티키리키의 곳간도 가득 찬 9월.
계절이 바뀜에 따라 가을 맛이 가득한 애플 시나몬, 카다몬 무화과 허니 스월과 같은 신메뉴들을 출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애플 시나몬은 애틋하다.
우리가 만난 첫 해 가을이 생각나는 아이스크림으로 유난히 손과 마음이 많이 가는 맛이다.
손님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 지는지 특히 인기가 많아, 만드는 족족 솔드아웃이 되곤 했다.
그리고 또 미뤄왔던 일들 중 하나인 스티키리키의 MD상품을 만드는 것.
우리 둘을 위한 머그잔, 아이폰 케이스, 챔피언 후드를 시작으로
손님들에게 판매용으로 제작한 반팔티셔츠와 연필도 완성되었다.
티셔츠가 도착한 밤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라는 설렘반 걱정반으로 일일이 정성 들여 포장을 했다.
가게에 어떻게 걸어두는 게 좋을까 요리조리 궁리를 하기도 하고.
그래도 티셔츠까지 걸어두고 나니 왠지 가게가 한층 더 꽉 차 보이는 느낌이다.
가게를 오픈하고 4달이 되었지만
가게 문을 닫고 준비를 하는 월-수요일은 늘 여전히 설레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갓난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한시도 눈에서 떼어놓을 수 없고 조마조마한.
그러다 다시 목요일이 되어 사람들이 찾아오고 가게가 바빠지면
안도의 마음과 함께 불안의 두배 크기로 감사함이 든다.
사람들이 이렇게 또 찾아와 주다니.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가끔씩 손님들이 보내주는 메시지나 포스팅들을 보며
우리의 스티키리키가 사랑받고 있구나라고 느낄 때엔 더없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
단 한치의 거짓도 없이 우리만의 방식 그대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 브랜드가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리고 6평 남짓 작은 공간이지만 하루 종일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9월의 어느 날엔 너무나 예쁜 꽃을 선물해주신 단골 커플과 일본에서 멜빌 포스터를 공수해주신 단골손님.
매일매일 우리의 하루를 빛나게 만들어주는
그냥 '손님'이라고 부르기엔 특별한 사람들.
늘 감사하다.
그리고 9월엔 친구가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책이 출판되었다.
<오후를 찾아요>
솔미의 문장에 가장 큰 빚을 져온 사람은 내가 아닐까?
15년 동안 솔미는 솔미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준 친구이다.
그런 친구의 작가 데뷔와 첫 책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길.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솔미의 문장에 위로받을 수 있길 바라본다.
가게를 시작하고 나선 주말이라고 해서 늘어지게 쉬거나 하는 건 더 이상 사치가 됐지만,
9월엔 조금 더 여유를 찾았다.
친구와 토요일 낮 볕을 쬐며 커피도 하잔 하고,
가보고싶었던 작은 문구용품 가게에도 가보고.
지저분 했던 머리도 정리를 하고,
또 가게일을 일찍 마친 밤엔 짝꿍과 동네 산책을 하며 먹태에 맥주한잔도 하고.
한 해 농사를 잘 짓고 추수를 하고 난 농부의 마음처럼.
정직하게 열심히 지내온 올 한 해의 수확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9월에서야 찾아온 여유를 즐긴 한 달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그간 버텨온 몸이 휴식을 달라며 탈이 나기 시작했지만.
오늘 느낀 이 여유가 높아지지 않고 깊어지는 어떤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9월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