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첫 번째 이야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꿈 하나만 믿고 버티던 시절.
그때 함께 스터디를 하던 친구와 이 글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한 적이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일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백수 시절을 게으르게 보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내가 정말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자책을 많이 했다. 가끔 친구들이 로또 1등에 당첨이 되어서 평생 쉬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나는 앞으로도 쉴 생각이 전혀 없다. 죽기 전까지 많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매일 조금이라도 일을 하고 싶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로또를 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25살에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여러 개의 직장을 거쳐갔다.
금융권 대기업 공채, 계약직 교직원, 무직(언론고시 준비), 정규직 교직원, 무직(대학원, 졸업 후 구직)을 거쳐 마지막으로 찾은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직종과 계약 형태를 체험(?)해 본 것 같다. 돈을 많이 주지만 힘든 직업, 돈을 적당히 주지만 비전이 없는 직업, 돈을 조금 주지만 편한 직업 등...... 그리고 경험을 통해 내가 직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을 통해 받는 보수보다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주는 정규직 자리보다는 다소 유동성이 있는 계약직이었을 때 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차피 떠날 곳이고 또 다른 곳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회사에서 일을 꽤 잘하는 편이었고 매번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던 것 같다. '어? 일을 참 잘하는구나. 그럼 더 많은 일을 줄게.' 그래서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성과를 인정해주는가 싶다가도 실수가 생기거나 혹은 일이 너무 많아서 업무 분장을 다시 해달라고 요청하면 바로 나가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윗사람이 잘못한 것을 나에게 떠넘겼을 때 정규직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아주 긴 직장생활은 아니었지만 결국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내게 보장된 자리가 그렇게 안정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크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정년이 보장이 되는 마지막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온 가족이 반대하였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고 전문성이 있어서 나의 자리가 누군가에게 쉽게 대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회사원'보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회사원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찾은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은 지금까지 해 왔던 다른 업들에 비해 좋았다. 여기에서도 물론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학기제로 운영이 되다 보니까 정말 보기 싫은 학생이나 동료도 딱 한 학기만 버티면 끝이었다.(실제로 정말 보기 싫은 사람도 없었다.) 또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을 하면 나름의 보람과 의미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수업을 준비하는 것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으니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모든 직업이 100%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듯이 이 직업 역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상당히 불안정했다. 언니는 사설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데 영어 강사조차 연간 계약으로 이루어지는데 한국어 강사는 학기마다 계약을 하는 초단기 근로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매번 언니에게 '겨우 그거 받으려고 그렇게 공부했어? 그냥 대학 나온 나랑 똑같네.'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물론 시간당 페이가 적지는 않지만 일정 시수 이상은 학교에서 4대 보험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암암리에 시수 제한이 있고 한 학교에서만 일을 하면 정말 최소한의 생계유지만 할 수 있다. 또한 경력이 많아진다고 해서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했을 텐데 졸업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냉혹한 현실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졸업할 시기에 '사드'라는 이슈가 있어 중국인 유학생이 대폭 감소했고 신규 채용은커녕 기존의 강사들도 시수를 보장받기 어려웠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계절을 또 무직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매일 채용 공고를 찾고 꾸역꾸역 원서를 냈다. 그리고 2018년 5월 드디어 한 고등학교에 정식 채용이 되었다. 우리 집은 일산, 학교는 남양주. 왕복으로 4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는 기쁨에 피곤함도 잊었다. 다행히 학생도 밝고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직업 만족도가 20% 정도는 상승했다.
비슷한 시기에 모교에서 임시 강사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강사이기 때문에 정식 채용이 아니어서 재직 중이던 선생님들께 먼저 시수가 배정되고 남은 시수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학기 동안 먹고살 수 있는지 여부를 개강 하루 이틀 전에서야 알 수 있었다. 학기 중에는 나름 즐겁게 생활하다가도 방학이 되면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 학기 불안에 떠는 임시 강사의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부지런히 이직 준비를 했고 결국 두 개의 대학교에 정식 채용이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출근을 하고 적당한 시간 일을 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꽤 긴 여름 방학 동안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고 직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걱정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기기 전까지.
사실 재직 중이었던 두 대학의 학생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분위기였다. 한 곳에서는 이미 몇 학기 전부터 다른 학교에서 시수를 더 받거나 이직을 하면 좋겠다는 권고를 받았고 봄, 여름 학기는 강의를 못 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다. 또 다른 한 곳에서는 강의 평가 순으로 인원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론 강의 평가가 항상 좋지만은 않았기에 '언젠가 나의 순서가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했었다.
봄 학기가 시작되기 전 겨울방학, 2020년 2월 언니가 있는 필리핀으로 왔다. 이 시국에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욕을 할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가 생기기 한참 전에 비행기 표를 발권했었고 언니가 부탁해 놓은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루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그 당시만 해도 신천지 이슈가 터지기 전이어서 확진자가 이렇게 많지도 않았다. 언니와 형부, 조카와 함께 외식을 하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상대로였다. 하루가 다르게 계속 늘어나는 확진자 때문에 어느새 한국은 중국을 이어 세계 2위의 위험 국가가 되었고 기존에 있던 학생들도 돌아가고 한국에 입국하려고 했던 학생들도 취소하게 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삼키기 어려웠다. 힘든 시간을 견디며 어렵게 준비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자 눈물만 나왔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없는 무직의 상태에 가장 큰 불안을 느끼며 깊은 절망에 빠진다는 것을 언니도 잘 알고 있었다. 개강에 맞춰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당장 돌아갈 이유도 없어졌다. 그 전에도 학교에서 구조조정이 있었을 때 만약 잘리면 언니가 있는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언니가 먼저 제안을 해줬다. 먼저 이렇게 된 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강의 평가가 좋았더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이미 자책을 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강제 휴식이지만 이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를 바란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그래도 너무 길면 싸울 수 있으니 최대 3개월 정도?) 있어도 되고 그 시간 동안 그냥 조카와 놀면서 보내지 말고 이왕이면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배우면서 지냈으면 한다고 했다. 이미 형부에게 말했고 형부도 재충전을 하면서 즐겁게 지내다 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고.
그렇게 필리핀 마닐라에서 두 달 살기가 시작됐다. 항상 불안한 시기에 내 영혼을 갉아먹으며 지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누구보다 알차게 시간을 보내다 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오랜만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물론 결심과 다르게 가끔 자다 깨서 막막함에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사실 당장의 힘듦보다 앞으로 이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정한 삶이 코로나보다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