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서지 않는다는 것
조용히 화난 기록 ― 위에 서지 않는다는 것
나는 이 멈춰 있는 도시에서
같은 자리에 늘 있어 왔다.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는
내가 있는 약전약국 건물 바로 옆,
아직도 폐허처럼 남아 있는
옛 적십자병원 자리다.
병원 기능을 멈춘 지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2025년,
이곳에 잠깐 전시가 들어왔다.
설명이 붙고 조명이 켜졌지만
재개는 아니었다.
잠시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공간과
말해지지 않은 시간이다.
⸻
내가 일곱 살이었는지, 여덟 살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스트레스로 머리에 탈모가 생겼고,
아빠 손을 잡고 이 병원에 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날 원장 선생님은
아빠의 친구였다.
어디 과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직함은 기억나지 않는다.
피를 검사하려고
주사기로 피를 뽑다가
잠시 멈추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엽이 피는
색깔이 참 예쁘네.
나는 그 말을
그 자리에서는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해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생님이 서 있던 자리와
내가 앉아 있던 자리,
그 방의 위치는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는
그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기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관리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저
정지라고 부른다.
⸻
전시를 천천히 둘러보며
오류들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연표의 어긋남,
표현의 부정확함,
맥락이 빠진 설명들.
기획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주변에 물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했다.
이 부분은 이렇습니다.
이 부분은 수정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광주광역시에서 나왔다고 소개된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분은 내 연락처를 물었고
명함을 건넸다.
나는 그 명함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장면만 남아 있다.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가 끝났다는 사실만.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잠시 짚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았고,
충분하지도 않았으며,
지속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엉뚱한 축제 같은 형식으로
기억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기관을 대표한다고 말하며
행정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
‘관’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민 위에 설 수도 없고,
시민을 보호하지도 못한다.
그 무능은
이미 역사에서 증명되었고,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면
적어도 기준은 이것이어야 한다.
지키지 못했다면,
적어도 공격하지는 말아야 한다.
보호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시민을 문제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기억을 관리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시민을
대상이나 관람객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 기록을 남긴다.
말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누구 위에 서 있는지를
다시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건
겁이 생겼다는 고백이 아니다.
이 도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조용히 확인하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