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보존되는 순간, 살아 있지 않게 되는 것들에 대하여
요즘 브런치를 보다 보면
글이 많다는 생각보다
글이 잘 보관되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정리되어 있고,
적당히 감동적이고,
무해한 문장들이 가지런하다.
읽을 수는 있지만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글이 왜 이렇게 오래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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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찰스 부코스키**의 시가
유독 와닿았던 시기가 있었다.
문장을 다 외우지도 못했고,
지금은 정확히 인용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그 시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글은 지금
‘보호’되고 있다.
전문은 쉽게 읽을 수 없고,
맥락은 요약으로만 전달된다.
그가 정말 원했을까, 이런 상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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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죽고 난 뒤
글이 안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부터 글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관리된다.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설명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고,
“이 작가는 이런 사람이었다”라는
과거형 문장에 고정된다.
이건 보존이지, 생존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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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작가가 죽어서 박제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글을
그냥 읽히게 놔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틀리게 읽히든,
오해되든,
마음대로 인용되든.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오픈소스라는 말이 어색하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글이 더 이상
주인의 손에 있지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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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산다는 건
기념관에 걸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현재에
불쑥 끼어드는 일이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
엉성한 문장으로,
그러나 필요할 때
다시 불려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완벽하게 보존되어도
그건 이미 죽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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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멤버십이 생기고,
연재가 관리되고,
글이 관계와 수익으로 정렬되는 걸 보면서
나는 자주 생각한다.
이건 글을 살리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오래 두기 위해
조심스럽게 눕혀두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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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쓰지 않아도 되는 날에는 쓰지 않고,
읽히지 않아도 되는 문장은 남겨두고,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글을 고집한다.
그게 박제되지 않는 쪽에
조금 더 가깝다고 믿기 때문에.
영원히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