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예술가가 대부분인 연주회를 보고 나왔을 때, 우연히 다른 관객의 대화를 듣게 됐다.
“보이지도 않는데, 피아노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지?”
“그러게. 보이지 않으니까 인사할 때도 옆에 다른 정상인의 도움을 받아서 인사했잖아. 나는 그때 너무 감동적이더라.”
만약 위 내용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을 꼭 들어보길 권한다.
예술가의 공연, 전시, 작품은 예술 자체로 평가받는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없잖아 있다. 예술가의 성품이나 사상에 따라 평가가 좌지우지될 때도 있고, 감상자의 취향에 따라, 사회적·시대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예술 활동에서는 이 ‘평가’라는 부분에 한가지 요소가 더 얹어진다. 바로 ‘극복’이라는 키워드다.
장애 예술가의 작품은 그 작품 자체가 주는 느낌이 아닌 ‘극복’에 감동 포인트가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이런 분위기는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게 그리 큰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예술가가 예술만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버즈비트 프로젝트를 끌고 오면서 내가 만났던 장애 예술가는 모두 잘했다. 연주 테크닉도 그렇고, 음악적 해석도 그 수준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개인차는 존재하지만, 그건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장애·비장애 상관없이 나에게는 그저 예술가일 뿐이었고, 연주 조금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 연습 좀 덜 하는 사람과 더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즈비트 프로젝트와 관련된 공연을 기획할 때도, 관객이든 매체 기자든 많은 사람은 “기술적 도움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예술은 실력이고, 기술은 환경 조성을 위한 보조”라고 생각해왔다. 기술은 부차적이며, 개개인의 기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환경의 개선과 약간의 기술 보조만 있고, 예술가로서의 실력만 충분하다면 불가능한 것은 정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프로젝트 이름은 <지금 아니면 언제?>라 명명했다. 사회는 장애인에게 항상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점점 세상이 바뀔 것이라 이야기한다. 교육부터 이동권, 노동권, 더 나아가 생존권까지 장애인을 위협하는 요소는 사회 곳곳에 있으나 바뀔 것이니 기다리라고만 한다. 한국 사회만큼 속도감 있게 빠르게 변화하는 곳도 없는데, 유독 장애인에 관한 것은 더디다. 예술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 <지금 아니면 언제?>는 공연과 워크숍,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까지 아우르는 사업이었다. 다행히 비교적 큰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충분하진 않지만 적지도 않은 예산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장애보다는 창작과 연습 과정에 집중하려 했고, 워크숍은 시각장애인 대상 지휘 워크숍에 더해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용 창작 워크숍을 함께 계획했다.
공연은 시각장애 연주자와 비장애 연주자, 청각장애 무용수와 비장애 무용수, 그리고 나래이터와 지휘자, 안무가가 함께하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극 <병사이야기>를 기획하게 됐다.
프로젝트 <지금 아니면 언제?>는 더디기만 한 사회를 향한 질문 아닌 질문이다.
사실 별로 안 궁금하다.
그냥 지금 당장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