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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도민 Sep 18. 2023

우리는 같은 무대에 있다

프로젝트 <지금아니면언제?>에는 공연 외에도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원대한 목표도 있었다. 문제는 장편 다큐멘터리 제작은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이전에 단편은 만들어 봤으나, 장편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제작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필요한지도 몰랐으며,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병사이야기>는 제대로 남기고 싶다’라는 마음만이 있었다.     


단편 다큐멘터리 <Sound is Vibration>에서부터 함께 작업했던 최종원 감독에게 의뢰했지만, 그는 장편은 힘들 것 같다며 고사했다. 대신 한 다리 건너 독립 영화 쪽에서 활동하는 감독이 있다며, B를 소개해줬다.

B 감독은 내가 제안한 콘텐츠가 흥미롭다며 자신도 합류하길 원했다. 당시 예산 지원이 확정되지 않았던 때라 예산은 내가 가져오는 것만큼 본인도 투자하겠다고 했다(이때 이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몇 차례 미팅을 가지는 동안 나는 기대했던 예산을 확보했고, B 감독과 시놉시스와 추가 예산 확보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추가 예산은 고사하고, 시놉시스의 방향이 문제였다. B가 가져왔던 시놉시스는 시혜적 시각이 다분했다. “장애 예술가가 장애를 극복하고, 일반인 예술가와 협업하는 과정”으로 풀어갔다. 내가 주야장천 이야기했던 “장애 예술가가 아니라 그냥 예술가”라는 메시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몇 번의 추가 회의 후 나와 B는 서로의 입장 차를 확인하고 프로젝트를 접기로 했다. 정확히는 B와는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지 않기로 했다. 

상황을 알고 있던 최 감독은 나에게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그냥 네가 연출 맡으면 된다고, 오히려 잘됐다고 했다.     


최 감독에게 했던 오히려 잘됐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최 감독은 버즈비트 프로젝트 초기부터 함께 해왔으니, 장치에 대한 이해부터 연주자, 개발자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했기에 장애나 예술을 바라보는 서로의 시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연출 경험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원했던 콘텐츠는 예술과 사람에 관한 있는 그대로였지, 시혜적이고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 감독으로 연출을 교체한 이후 제작 크루가 꾸려졌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놉시스도 제대로 나왔다.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창작과 공연에 참여하는 모두를 조명하기로 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예술가의 이야기도 있지만, 결국 모든 예술가와 작품 자체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고되다. 연습부터 워크숍, 각종 테스트, 무대 리허설, 그리고 실연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은 장애·비장애인 모두에게 쉽지 않다.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예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큐멘터리 <우리는 같은 무대에 있다>는 6개월간의 과정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총 900시간, 약 5 테라라는 엄청난 양의 촬영 분량은 11개월에 걸친 편집 과정을 거쳐, 93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로 태어났다.     

다큐멘터리는 제23회 가치봄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관객상을 받았다. 처음 나에게 개발자 바하칸을 소개해줬던 기획자 키르시는 이 소식을 듣고, 본인이 기획하는 액세스 탐페레(Access Tampere)에서의 상영을 요청했다.


액세스 탐페레는 장애 예술인이 모이는 페스티벌로, 예술 접근성 사례, 교육 프로그램, 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이런 행사 성격에 맞춰 상영본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청각장애인은 영화 감상을 위해 별도의 해설 자막이 필요한데, 이게 보편적인 국문 자막과는 다르다. 대사는 물론, 화면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자막으로 표현해야 한다. 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작 해보면 상당히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전문가가 아니면 제작이 쉽지 않다. 

가치봄영화제의 장점은 가치봄 자막이라 불리는 청각장애인용 해설 자막을 무상으로 제작해 준다는 점이다. 

우선 가치봄 영화제 사무국에 연락했다. <우리는 같은 무대에 있다>의 한국어 가치봄 자막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청각장애인용 영문 자막과 시각장애인용 음성 더빙까지 입힐 계획이었다. 가치봄 영화제 사무국에서는 흔쾌히 사용 허락을 해주었고, 나는 무리 없이 번역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영문 가치봄 자막을 만든 김에 시각장애인용으로 영문 더빙도 할 계획이었다. 영문 더빙의 경우 주로 외국인 성우가 녹음하는데, 발음이나 톤을 보고 결정한다. 작품에 따라 너무 어둡거나 너무 즐거운 톤이면 안되기에 이 역시 신중했다. 

영문 더빙 시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녹음할 것인가”이다. 대본은 위에서 언급했던 영문 가치봄 자막 대본이었는데, 이것은 청각장애인용이고, 음성 더빙은 또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니 모든 글자를 다 읽고 녹음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대본에서 ‘소리’에 관련한 부분을 모두 삭제하고, 장면 설명을 늘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시각장애인용 음성 더빙 내용은 청각장애인용하고 달라야 한다는 점을 녹음 들어가기 불과 며칠 전에 깨닫고 기한을 맞추기 위해 급하게 혼자 작업했는데, 이 부분이 아쉽다.     


다행히 액세스 탐페레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장애 예술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긍정적 반응도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함께 작품 창작 활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작품 <병사이야기>에 대한 저작권 이용 허락이 액세스 탐페레 이후 종료되어 현재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최 감독과 함께 다른 영화제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저작권 이용 기한도 늘려 더 많은 사람에게 보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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