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도민 Oct 05. 2023

관계는 관계를 낳고

귀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만나게 된다고 했던가?


2016년 서울아트마켓을 찾았을 때다. 

서울아트마켓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아시아 주요 아트마켓 중 하나다. 전 세계에서 창작자, 기획자, 프로듀서, 바이어 등 예술계 주요 인사가 찾는 5일짜리 예술 장터다. 쇼케이스 공연, 혹은 부스 전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고, 페스티벌, 기획사 등과 판권 계약을 하며, 각종 네트워킹 행사를 통해 사람과 만나는 자리다.      


사실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방문했었다. 그저 아는 사람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이었기에 특별히 준비해 간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장애 예술 활동 계에서 거물로 통하는 인물인 키르시 무스타라흐티(Kirsi Mustalahti)를 알게 됐다. 그냥 알게 된 게 아니라, 아예 함께 작업하며, 한국 장애 예술가의 해외 공연을 하나둘 성사시켜 나갔다.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와 나의 관계는 돈독해져 갔다. 일 외에도 개인적인 생각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키르시에게 시각장애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방법을 찾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의외로 바로 입을 뗐다.      

"영국에 장애 예술가를 위한 장치를 개발하는 회사가 있고, 거기 대표가 나랑 친하니까 소개해 줄게."     

그렇게 나는 휴먼인스트루먼츠(Human Instruments)를 알게 됐다.     


휴먼인스트루먼츠는 런던에 소제한 작은 회사로, 기술적 접근으로 장애 예술가의 창작활동에 날개를 달아주는 곳이다. 예를 들어,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트럼펫 연주자를 위한 호흡으로 음정을 조절하는 악기 혹은 두 손가락으로 음정과 가상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악기 등을 개발해 왔다.     

홈페이지의 정보만으로 내가 봤던 건 상당히 의미는 있지만, 돈 되는 작업을 하는 곳은 아니라는 점과 어쩌면 내가 찾는 해답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 이곳에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답이 있었다.     


바로 지휘인지장치 버즈비트(Buzzbeat)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버즈비트는 비트버즈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이었다. 영국의 작곡가 롤프 게하(Rolf Gehlhaar)가 제시했던 아이디어다.     

롤프 게하는 휴먼인스트루먼츠의 대표 바하칸 마토시안(Vahakn Matossian)의 아버지로, 슈톡하우젠과 함께 활동했었던 현대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자, 예술과 기술 융합이라는 개념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1970년대부터 발명가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다. 비트버즈는 2015년 그가 파라오케스트라를 위해 고안했던 장치이나, 실제로 사용되진 않았었다.     


나는 대표 바하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수차례 이메일과 유선 회의를 나누며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 걱정됐던 포인트는 서로 말이 통할까?라는 의구심이었다. 한국어와 영어, 이 이야기가 아니라, 개발자의 언어를 하나도 모르는 내가 그가 쓰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걱정이었다. 평생을 예술 쪽 언어만 사용해 왔던 나에게 큰 산이 아닐 수 없었다.      

바하칸은 개발자이면서 테크 디자이너다. 그리고 작곡가이자 DJ로도 활동하고, 파트너와는 밴드 활동도 한다. 이런 점으로 인해 그는 개발자와 예술가의 언어 모두를 사용할 줄 알았다. 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냥 영어만 열심히 독해하면 되니까.     


이런 점은 나에게도 큰 메리트였다. 당시 나는 뭘 아는 게 없으니 겁도 없이 덤볐다. 덤볐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물론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런 점으로 인해 나와 바하칸은 몇 번의 이메일과 유선 회의를 거쳐 어떠한 합의서 혹은 계약서도 없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 예술 활동에 대한 서로의 로드맵과 공동의 목적만을 바라본, 그 '뜻'과 '대의'만을 향한 시작이었다.     

당시에 나는 몰랐지만, '기술개발'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언제 끝날지, 얼마나 많은 비용이 투입될지 가늠이 어렵다. 그렇기에 이런 류의 프로젝트는 중간에 어그러지기도 쉽고, 최악의 경우 법적 분쟁까지 갈 수도 있다.     

공신력 있는 문서 하나 없이 시작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한 의사결정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돈만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계약 관계만으로 프로젝트에 접근했다면 지금의 버즈비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만사가 그렇지만, 특히 공연 만드는 일은 관계에서 시작되고 관계 하나로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버즈비트 프로젝트도 그렇다.      

우연한 기회로 키르시라는 사람을 알게 됐고, 키르시가 또 바하칸을 소개해줬다. 상통된 입장과 성향을 바탕으로 일이 진행되고, 관계가 관계를 낳고, 때로는 관계가 정리되기도 함으로써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관계의 변화를 통해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전 03화 시각장애인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