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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도민 Oct 05. 2023

시각장애인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한다?

2016년이었다. 

대학교 후배 A가 본인의 독주회 기획을 부탁했다. 나는 이미 대학에서 화석 취급받을 만큼 오래전 졸업한 상태이고, A와도 함께 공부를 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A는 시각장애인으로, 꽤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주자여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A의 독주회를 다른 비장애 예술가의 공연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접근했다. ‘장애’라는 키워드에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 잘 몰랐다. 나 역시 장애인이지만 일상에 큰 지장은 없는 수준이라 정작 장애 예술 활동에 관한 이해가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장애’라는 키워드가 공연을 올리는 것에 있어 중요한 건 아닐 수 있지만, 홍보를 비롯한 외적인 부분에서 봤을 땐 좋으나 싫으나 무시 못 할 요소다. 저런 부분에 있어 무지했던 나는 당시 준비 단계에서부터 많은 걸 놓쳤고, 돌이켜보면 기획 부분에 있어 아쉬움을 남긴 공연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A의 독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연주회를 찾았고, 언론의 관심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내 생각보다 다들 장애인의 예술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보다는 ‘장애’에 관심이 많다는 인상이 강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왜 다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악기를 연주할까’에만 관심을 둘까? 내가 아무리 장애에 무관심했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연주회 후기부터, 위에서 언급했던, 내가 이 연주회를 기획하며 느꼈던 유쾌하지 않았던 그 느낌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나의 목표는 너를 지칭하는 수식어에서 ‘시각장애인’을 빼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이어서 물었다.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냐”라고. 

내 질문의 의도는 "다음 공연은 무슨 콘셉트로 생각하는가?" 정도였지만, 그 친구의 답변은 의외였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싶어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귀퉁이에는 ‘시각장애인이 오케스트라를...?’이라는 의구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연주 실력만 뒷받침되고, 연습만 충분히 한다면, 안될 이유가 정말 있을까? 

악보? 악보는 외우면 된다. 심지어 내가 봐온 시각장애 연주자들은 보편적으로 비장애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외운다. 악보를 외우는 것 역시 개인의 문제다.      

시각장애인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걸림돌은 ‘지휘’다. 이건 시스템의 문제고, 개인이 혼자 해결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서양 음악에서 지휘는 중요한 존재다. 여러 연주자를, 악기를 하나로 만들어주고, 다 같이 연주할 수 있도록 이끈다. 단순하게 큰 소리, 작은 소리, 더 빠르게, 더 느리게, 이런 기능적인 것을 넘어 음악적 감정선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중증 시각장애인은 지휘를 볼 수 없으니 지금까지 고전적인 형태의 오케스트라나 앙상블에서 배제되어 왔다. 실제로 중증 시각장애인 중에는 뛰어난 음악적 기량으로 음악 대학에 진학한다 해도, 교향악 수업, 관악합주와 같은 지휘자가 존재하는 수업에서는 가만히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중증 시각장애인은 정말 오케스트라 활동이 불가능할까? 아니다. 다 나름의 방법이 있다. 

영국의 파라오케스트라(ParaOrchestra)는 단원 모두가 장애인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다. 이들은 단원 중 시각장애인이 있는 경우, 지휘자가 단상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지휘 없이, 서로의 소리에만 의존해서 연주한다. 모두를 동등한 상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국내 대표적인 시각장애인 교향악단 하트체임버시각장애인오케스트라(이하 하트체임버)는 연주자 겸 예술감독인 이상재 교수가 지휘자 역할까지 맡는다. 이상재 교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던가, 입으로 숫자를 세는 등 소리로 다른 연주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국내 맹학교에서는 합주부를 운영하고 있다. 합주부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다. 1968년 대구 광명학교에서 처음 시작됐으며, 지금은 전국의 모든 맹학교가 학생들의 협동심 고취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지휘를 볼 수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합주부를 운영할까? 하트체임버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사용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무선가이드라 불리는 장치를 사용한다. 뉴스 장면에서 종종 등장하는 동시통역기와 유사한 장치로, 학생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선생님의 음성에 따라 연주를 시작하고 끝맺는다.      


하지만 이런 ‘소리’ 지휘의 경우 제약이 뚜렷하다.

우선 연주와 감상에 방해가 된다. 감상에 방해가 된다는 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교향곡의 2악장, 조용하게 시작하는데 누군가 소리 내어 말한다. "하나, 둘, 셋, 넷". 이 소리는 관객에게 불편할 수 있는, 소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소리 지휘는 연주에도 방해가 되는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는 지휘에만 의존해서 연주하는 게 아니다. 나의 소리, 다른 악기의 소리, 이 모든 게 연주자에게 신호가 되고, 이를 통해 음량 벨런스, 음색 등을 조절한다. 그런데 연주자가 이어폰을 꽂고 있는다면, 이렇게 다른 소리를 듣는 것에 방해가 된다.

두 번째는 소리 지휘의 경우 박자를 세는 것 이상의 기능은 어렵다는 점이다. 예비박을 입으로 세어 음악이 잘 시작됐다 하더라도, 음악이 흐르고 있는 도중에 음량을 키운다던가, 더 빠르게 연주해야 한다던가, 아니면 멈췄다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등 수많은 지시를 일일이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대한 문제점인데, ‘소리’ 지휘는 일부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예술단체를 제외하면 그 어떤 교향악단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 단계에서부터 고전적인 지휘 체계에 대해 배제된 시각장애 연주자는 예술을 함에 있어 시작부터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이런 현실의 장벽은 예술가를 그냥 예술가가 아닌 ‘장애’ 예술가로만 남도록 만들었다. 장애 예술가에게 있어 당사자성을 지닌 장애는 자기표현과 창작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타의에 의한 제약으로 작용한다면, 반대로 창작환경을 협소하게 만들게 된다. 앞서 밝혔던, ‘시각장애인은 교향악단에서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나조차 가졌던 의구심은 사실 이런 장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시각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은 평등해야 하고, 다양한 사람의 교류를 통해 더 아름다워진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장애·비장애 예술가를 단절시켜 예술계 다양성을 저해하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A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시각장애인이 교향악단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 그것은 일개 개인의 꿈이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정말 한국 예술계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조금이라도 건강한 창작활동과 창의적인 환경을 위해서라면 필연적인 것 아닌가?     


내가 공연 만들면서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힘들게 배웠던 것이 예술은 평등하다는 점과(물론 시장은 평등하지 않다) 예술은 분리와 경계가 뚜렷해져만 가는 세상을 중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예술의 현실은 포용과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건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했다. 나는 공연 만드는 것 이외에는 무지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이전 02화 연주자의 길은 멀고도 험해. 그래서 그만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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