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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도민 Sep 12. 2023

연주자의 길은 멀고도 험해.
그래서 그만뒀어.

공연 만드는 일을 하기 전 나는 연주자였다. 


"연주자로 활동했다"라고 하기에는 사회에서의 연주 경력은 매우 짧았다. 잠깐 교환학생 신분으로 외국에서 공부했을 때, 담당 교수님 소개로 연주단체 인턴 단원으로 활동했던 것, 졸업 후 음악 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간간이 연주회 참여했던 것, 그리고 연극 작품에서 연주자로 잠깐 활동했던 걸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러니 자신을 연주자였다고 규정짓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조금 민망한 일이긴 하다. "연주자"보다는 오히려 "전공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다녔던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학생이지만 프로에 준하는 연주자”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당연했다. 선배들로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고, 나 또한 후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돌이켜보면, 이런 분위기가 나에게는 상당한 부담과 중압이었다. 


이 부담감이 가장 컸던 때는 교향악 수업이었다. 예중, 예고가 아닌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었던 나에게 교향악 수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

지휘를 보는 법도 몰랐고,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할 때 소리의 밸런스를 맞추는 법도 몰랐다. 단순히 악보를 읽을 줄 아는 것 이상의 능력과 센스가 필요한 일인데, 커리큘럼은 이미 그런 기술이 있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학생이나 프로에 준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연주자로는 살아남기 힘들겠구먼...’     

사실 예중 예고 출신이 아니어서 못 따라갔다는 말은 변명이다. 왜냐면 나의 동기 4명 중 1명을 제외하면, 대학 이전 교향악 수업 경험이 전무했지만, 그들은 잘 따라갔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아 시절 백내장 제거 수술을 거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나마 보이는 눈도 시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닌 데다 제대로 관리 안 하면 금방 안 좋아질 것이다. 덕분에 보편적인 거리 감각도 없고, 금방 피로해지는 눈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도 자전거도 무리 없이 탈 정도로 일상에는 큰 어려움을 못 느끼지만, 가끔 불편함을 겪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체육 시간은 대부분 앉아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친구들이 농구, 축구를 할 때면 정말 앉아만 있었다. 거리 감각이 없어 누군가가 나에게 공을 주더라도 내가 그걸 받아 맞는 방향은 고사하고, 의도한 쪽으로조차 넘겨줄 가능성은 없었다.     


거리 감각이 없기에,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애로사항이 있었다. 

나는 타악기를 전공했다. 타악기 전공이라면 특정 악기 하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쳐서 소리 나는 모든 것”을 다룬다. 아마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톱으로 연주해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거리 감각의 부재는 웬만한 악기에서는 큰 문제없었으나, 건반 타악기, 이를테면 실로폰이나 마림바(실로폰의 커다란 버전을 상상하면 된다)를 연주할 때는 걸림돌이었다. 

말렛(끝에 둥그런 실뭉치 같은 것이 매달린 스틱)으로 건반을 정확하게 쳐야 하는데, 거리 감각이 없는 나에게 제대로 된 건반을 때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불 끄고 연습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냥 건반의 위치를 몸이 기억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연습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 이야기고, 학생 신분일 때에나 가능했다. 졸업 후 사회에서는 이럴 틈이 없었다. 연주자로서 나는 너무 느리고 손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악기를 놓기로 마음먹었다.

학부 시절에 했던 예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이유로 악기를 그만뒀다고 하면, 이 역시 변명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예중 예고를 안 나왔어도 잘 헤쳐나간 사람이 있고, 나보다 눈이 좋지 않더라도 연주자로, 음악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악기를 그만뒀다고 음악이나 무대가 싫어졌던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공연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주변인으로라도 남아있고 싶다는 마음이었달까?

악기를 그만두게 된 이유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한몫하긴 했지만, 사실 악기를 잡지 않은 이후에는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왜냐면, 연주자가 아니었던 나는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굳이 조기 축구에 가입하거나 직장인농구팀에 가입하거나 그러지 않는 이상 나는 큰 불편함 없이 살았다.     


공연 제작부터 페스티벌, 해외 초청 공연, 국제콩쿠르 등 예술 분야에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하며 재밌게 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장애’와 ‘장애 예술 활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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