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도민 Sep 12. 2023

시각화된 소리를 위한 진동


첫 시연회의 프로젝트 타이틀은 <시각화된 소리를 위한 진동>으로 명명했다. 지휘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있어 가장 역사 깊고, 체계적인 방식인데, 그것을 진동으로 변환하여 전달하는 프로젝트였기에 정한 제목이다. 이견은 없었다.     


이견은 다른 부분에서 나왔다. 연주 레퍼토리 선정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나는 본 프로젝트를 “기술개발”이 아닌 “예술 교류”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기에 예술적 완성도 역시 중요했고, 이것 때문에 레퍼토리 역시 소품곡이 아닌 교향곡을 원했다.      

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전악장을 제안했으나, 지휘자와 개발자는 우려를 표했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은 충분한 개인 연습과 리허설이 필요한 어려운 작품인데,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한 연주가 아닌 새로운 기술이 사용되는 공연인 만큼 변수를 줄여야 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들은 <운명 교향곡> 중 비교적 합주가 쉬운 2, 3악장만 연주하는 것을 제안했다. 내 머릿속에는 어색한 연주회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예술적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가장 유명한 1악장을 빼고 연주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빠바바밤... 하는 그거 말이다) 심지어 <운명 교향곡>은 3악장과 4악장은 아타카(attacca, 이행부, 악장과 악장이 끊김 없이 이어져 연주되는 것)이기에 3악장만 연주하고 끝내게 된다면, 연주를 하다만 듯한 인상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지휘자와 개발자의 염려를 생각한다면 타협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지휘자와 개발자의 제안에 따라 <운명 교향곡>의 2, 3악장만 연주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도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짧은 소품이라도 좋으니 작품 하나쯤은 완전하게 오롯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자는 거였다. 


추가 선곡에 있어 나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연주하기 쉬운 작품. 왜냐면 우리는 연주자의 연주 기량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두 번째는 외우기 쉬운 작품. 시각장애 연주자가 중심이라 악보를 무조건 외워야만 했다. 그런데 복잡한 화성, 변칙적인 리듬 등이 많으면 암보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기에 준비 시간이 촉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음악적 변화가 많은 작품. 개발자의 목적은 지휘 인지 장치를 시험하는 것이기에 박자, 속도, 그리고 분위기의 변화가 많은, 한마디로 지휘가 “유의미”한 작품이어야 그 효과가 도드라져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작품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기에 나는 작곡가 최상근에게 아리랑을 활용한 소품을 위촉했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선율과 화성으로 연주와 암보가 어렵지 않지만, 4/4, 6/8, 3/4와 같이 박자가 계속 바뀌면서 음악의 템포와 분위기 역시 꾸준히 바뀌는 <아리랑 판타지>를 서곡으로 연주하게 됐다.

연주 레퍼토리 이슈는 비교적 짧고 쉽게 해결됐다. 어쨌든 참여자 모두의 목표가 같았으니, 논의도 유연하게 진행됐다.     


진짜 문제는 현장에서 발견됐다.     

11월이 됐고, 모두가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 모였다. 첫날은 한국 시각장애 연주자를 대상으로 기기 테스트가 진행됐다. 연주자가 버즈비트를 착용해 보고 느껴보면서 각자의 연주 스타일에 맞추어 감도를 조절하는 등의 시간을 가졌다. 기기는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모든 것이 준비된 듯 보였다.

다음날, 리허설 룸에 모여 연주자와 지휘자가 착용을 마쳤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흔들어 기기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하는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시각장애 연주자는 지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앞서 언급했듯, 시각장애 연주자를 위한 체계적인 지휘 교육 과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음악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에서도 지휘가 필요한 앙상블 수업에서 시각장애인은 배제 돼왔다. 이는 사회에서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는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으며,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기는 분명 잘 작동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시각장애 연주자는 지금 본인이 느끼는 진동이 음량을 키우라는 것인지, 줄이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휘자는 리허설을 즉각적으로 멈추고 지휘 개론부터 지휘의 기본적인 신호 체계부터 알려줘야만 했다.     


이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됐다.

“기술 개발”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사용자, 그러니까 시각장애 연주자를 위한 체계적인 지휘 커리큘럼이 함께 개발되어야만 했다.

이전 04화 관계는 관계를 낳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