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순례자

[수도 영성 고전] 1

by Peregrinante in Spem

(수도원 방문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 차원에서 수도 영성을 빛낸 고전 몇 권을 다시 읽었다. 고전이라고 하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다. 수도 생활과 수도 영성 분야의 주옥같은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순례기에 슬쩍 편입해 소개하고 싶다. 보잘것없는 나그네의 서툰 순례기보다 훨씬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가 앞다투어 번역서를 냈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학자도 같은 책을 번역했다. 아마 이런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더구나 그 책은 누가 썼는지 저자도 모른다. 러시아어로 된 책이니 원전에 직접 다가서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꾸준히 책이 팔리나 보다. 1979년에 첫 번역이 나온 이래로 잇따라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기존의 번역서들도 디자인을 바꾼 새 판을 내놓고 있다. 대체 어떤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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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순례자』는 러시아의 어느 떠돌이 수도승이 쓴 책이다. 가톨릭의 최익철 신부, 정교회의 강태용 신부가 이 책 1권과 2권을 각각 번역했다. 개신교에서는 『순례자의 길』(엄성옥 외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판본에는 이런 홍보 문구가 적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추천한 그리스도교 고전”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 4월 21일 수요 일반 알현에서 이 책을 언급했다. “러시아 순례자의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이 책은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이 책은 소리 기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러시아어 제목은 ‘영적 아버지께 드리는 순례자의 진솔한 이야기’라고 한다. 영어판 제목은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이다. 우리말 첫 번역은 『이름 없는 순례자』였다. 미국의 한 종교학자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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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름 모를 수도승이 남긴 순례기이다. 그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떠돌며 길 위에서 기도하는 순례 수도승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루하루 먹고 잠잘 곳도 없지만, 걱정도 불안도 버린 채 세상을 순례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고난과 사건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강도도 만나고 극진한 대접도 받는다. 군인, 사제, 산지기, 판사, 부랑자, 맹인, 은수자, 영성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체험을 나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길 위에서 실천하는 ‘끊임없는 기도’였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러시아 수도승은 이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걷고 호흡하며 심장 박동에 맞춰 짧고 단순한 기도를 끝없이 반복했다. 순례 초반에 만난 영적 스승이 가르쳐 준 예수기도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문의 원천은 성경이다. 예리코의 눈먼 이가 소리쳤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마태 20,30. 마르 10,47) 따돌림받던 세리도 가슴을 치며 말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예수기도는 이 소외된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외침은 동·서방 교회의 전례 안에 자비송(Kyrie)으로 도입되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어로는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다. 라틴어 미제레레(miserere)도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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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순례자는 걸으면서 기도했고, 기도하며 걸었다. 마침내 그는 기도가 가져오는 놀라운 내적 변화를 체험한다. 그의 영혼은 기쁨과 평화, 사랑으로 넘친다. 때로는 신비적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마음으로 하는 ‘예수기도’는 저에게 너무나도 황홀한 기쁨을 주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저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 때때로 저는 제 자신이 몸이 없는 것처럼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져 땅에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오강남 옮김)


예수기도는 14세기쯤 비잔틴에서 러시아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 없는 순례자』는 예수기도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공을 세웠다. 서방 그리스도교 지역에서도 동방의 예수기도 전통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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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순례자』는 진리를 찾아 세상 곳곳을 떠도는 구도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남방을 순례하는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연상시킨다. 불교에는 만행(萬行)과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전통이 있다. 수행자가 천하의 선지식을 찾아 두루 자유롭게 다니며 수행과 공부를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수도 전통에도 ‘순례 수도승’(monachus peregrinus) 또는 ‘방랑 수도승’이 있었다. (*1) 그들은 끊임없는 방랑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떠돌며 살았다. 지상의 삶 자체를 여행이나 순례로 규정하고 정주를 거부했다. 그 여정의 끝에는 물론 하늘나라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세상의 순례자인 동시에, 세상에 온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집도 고향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고향은 다가올 세상에 있었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속에 단 한 분을 모시고 다녔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신 그분이었다.


순례 수도승은 고대에서 중세 초기까지 있다가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이 세상을 ‘나그네나 순례자처럼’ 살아가려 했던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수도 전통과 순례 문화로 면면히 이어져 온다.



(*1) 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 김영룡 옮김, 2020,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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