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2 거룩한 동굴
다시 산길을 걷는다. 숲길은 차츰 좁아지고 살짝 가팔라진다. 여전히 아름답고 한적한 길이다. 배낭에서 물을 꺼내 몇 모금 마시고 쉬어가며 걷는다. 숲길과 차도가 다시 만나는 지점에 이르니 뜻밖에 성 베네딕토의 동상이 반겨준다. 초기 제자 두 사람을 포함한 네 명의 수도승과 함께 서 있다. 수비아코 시내가 내려 뵈는 지점에서 마을과 온 세상을 축복하는 모습이다.
제작 연도를 보니 1999년이다. 2000년 대희년과 성 베네딕토의 수비아코 활동 1500년을 기리는 뜻에서 제작했다고 적혀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 AI 덕분에 저런 외국어 독해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졌다. 예전엔 일단 사진을 찍어놓고 나중에 사전을 찾아가며 해독해야 했다. 머리 쓸 기회를 빼앗겼으니 편리한 만큼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마침내 동굴 수도원이 보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에 계단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수도원을 지었다. 첫인상은 절벽에 붙어있는 새 둥지를 보는 느낌이다. (이 수도원의 이름은 그냥 ‘성 베네딕토 수도원(Monastero di San Benedetto)’이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동굴 수도원’으로 약칭한다.)
“그 동굴까지는 길이 없었으니 (동굴은) 높이 솟은 절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로마누스는 절벽 위에서 기다란 줄에 빵을 묶고 거기에 작은 방울을 매달아 내려보냈다.” (『베네딕토 전기』 1,5) (*1)
베네딕토 전기는 수비아코의 동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실제로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절벽의 위용을 가늠할 수 없다. 거의 90도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이다. 수도원 입구에서 낭떠러지 쪽을 내려다보면 아찔한 느낌이 든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기도와 수행에 전념했다. 수도복을 주었던 로마누스 수도승이 일정한 날마다 빵을 공급해 주었다. 방울 소리는 빵을 받으러 나오라는 신호였다.
동굴은 베네딕토가 떠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기도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후대의 성역화 사업으로 동굴 수도원이 들어섰다. 12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두세 차례 암벽에 덧댄 건물을 세웠다. 절벽에 옹벽을 쌓아 길을 내고, 동굴 주변에 경당도 지었다. 지금은 수도원 성당을 통과해야 동굴에 접근할 수 있다.
(동굴 수도원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인상적인 몇 장면을 소개하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다. 여기 사진은 수도원 누리집에서 내려받았다.)
수도원 성당은 위·아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13세기에 아래층 성당을 짓고, 14세기에 그 위에 새 성당을 얹었다. 두 성당의 벽과 천장은 성경과 베네딕토 전기를 소재로 한 여러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분의 식사 시간이 되면 인근 숲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그분의 손에서 빵을 받아먹곤 하였다.” (『전기』 8,3)
수도승 베네딕토는 고독한 은수처에서 이처럼 까마귀 한 마리와 벗으로 지냈다. 그 까마귀는 나중에 베네딕토의 명을 받고 독이 든 빵을 멀리 내다 버리는 심부름까지 하게 된다. 후대의 수도승들은 이 일화를 기리려고 ‘까마귀의 정원(Cortile dei Corvi)’을 조성하고, 실제로 까마귀의 서식을 유도했다고 한다. 이 정원은 성당과 연결된 야외 공간에 있다.
까마귀의 정원에서는 절벽 쪽으로 손을 들고 서 있는 베네딕토 동상을 볼 수 있다. 그 받침돌에 이렇게 쓰여 있다. “Ferma o rupe, non danneggiare i figli miei!” (멈춰라, 오 바위야, 나의 아들들을 해치지 마라!) 위태로운 절벽 밑에 사는 수도승들이 혹시라도 바윗돌이 떨어질까 봐 성인의 보호를 청하는 내용이다.
특이하게도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성 프란치스코의 초상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는 12세기의 인물이다. 두 성인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치열한 복음적 삶으로 교회를 떠받쳐온 두 기둥이다. 그러면서도 그 방법과 영성의 색깔은 조금 다르다. 베네딕토 영성이 정주, 기도, 노동을 강조한다면, 프란치스칸 영성은 탁발, 가난, 형제애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긴 하다. 두 분 모두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겸손과 수덕(修德)에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3년에 이 동굴을 순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오상(五傷)의 성흔(聖痕)을 받기 1년 전, 선종하시기 3년 전이 된다. 프레스코화는 그로부터 5년쯤 뒤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보통 프란치스코 초상에 그려 넣는 성흔이나 후광이 없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프란치스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마침내 거룩한 동굴에 이르렀다. 입구에 청동 문을 달았다. 어두운 조명 속에 흰색 대리석으로 빚은 베네딕토의 조각상이 빛난다. 수도복을 입은 채 가슴에 손을 모으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청년 베네딕토의 모습이다. 제작 연도는 1657년. 불세출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제자 안토니오 라지(Antonio Raggi)의 작품이다.
바로 이곳이다. 천오백 년을 이어온 수도 영성의 신성한 샘이 여기에 있다. 유럽인의 영적 고향이면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을 잉태한 위대한 자궁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흘러나온 영적 물줄기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의 들판을 적시고 온 누리로 퍼져나갔다. 어두운 동굴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시편 36,10)
(*1) 『베네딕토 전기』(이형우 역주, 1999, 분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