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토의 오솔길

02-01 성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by Peregrinante in Spem

로마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청년 베네딕토가 왜 수도 생활에 뜻을 두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는 스무 살 무렵인 500년쯤에 유학 중이던 로마를 떠났다. 그때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395년)되고 서로마는 이미 멸망(476년)한 뒤였다. 패망한 제국의 옛 수도는 아마도 절망과 패배주의 풍조가 만연하고 윤리적 도덕적 타락도 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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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가 찾아간 곳은 로마에서 동쪽으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수비아코(Subiaco)였다. 그곳 산속에서 은신하기 좋은 동굴을 찾아내고 3년 동안 머물렀다. 로마누스라는 수도승으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고독한 은수자로서 기도와 수행의 삶을 살았다. 지금은 그 은수처를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라 부른다. 거룩한 동굴이라는 뜻이다.


수비아코를 찾아가던 날은 9월 중순이었다. 초가을 단풍이라도 보려나 기대했지만, 중부 이탈리아의 계절은 한국보다 늦었다. 하늘은 맑고 쾌청했지만, 기온은 30도를 웃도는 여름 날씨였다. 배낭 속에 물 두 병과 간식을 챙겨 넣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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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아코 마을에서 동굴 수도원까지는 관광버스가 다닐 정도로 잘 포장된 도로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숲으로 접어들면 고즈넉한 산책로가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에 적당한 간격으로 받침돌을 놓았다. 그 위로 풀이 자라고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두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좋을 정도로 널찍하다.


배낭을 멘 여성 두 명이 앞서 걷고 있다. 마을 주민 한 분이 개를 데리고 뒤따라온다. 저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모두 이 길을 걷지 않았을까. 천오백 년 전 베네딕토 성인이 밟았고, 그 제자들이 오갔던 길도 아마 이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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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보고 숲도 보며 느리게 걷는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충만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런 길을 서너 시간 걷고 싶다. 너무 빨리 목적지에 닿을까 봐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기도의 길, 묵상의 길, 영성의 길, 은총의 길, 평화의 길, 순례자의 길, 이런 단어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길이다.


내 멋대로 ‘성 베네딕토의 오솔길’이라 명명했다. 꽤 괜찮은 이름인 듯해서 혼자 미소 짓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이제 이 길은 나에게 언제나 꽃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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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라디오 방송에 ‘기도의 오솔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윤해영(바실리사) 수녀님이 진행을 맡았다. 오솔길을 걷다 보니 문득 그 ‘기도의 오솔길’이 생각났다. 그때 들었던 유머 한 토막도 떠오른다. “퀴즈 하나 내볼게요. 사람이 흙에서 왔다고 창세기에 나오죠? 대체 어떤 흙일까요? 정답은 진흙입니다. 우리는 흙 중에서도 진흙으로부터 왔습니다. 무슨 근거가 있나요? 내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증거, 첫째, 열받으면 굳어진다. 또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질퍽거린다. 맞나요?”


오솔길을 걸으며 가만히 생각한다. 나는 열받지 않았을 때도 너무 굳어 있는 게 아닐까. 온통 엄숙 근엄 진지로 가득 찬 삶은 결코 온당하지 못하다. 대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의 메마른 삶이 그렇다. 나는 아무래도 그쪽에 가깝다. 벗어나고 싶지만 쉽게 안 된다. 흙에서 왔으니 흙처럼 부드러울 수 없을까. ‘성 베네딕토의 오솔길’을 걸으며 ‘온유’의 은총을 주십사고 청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마태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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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던 두 여성을 따라잡았다.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해 슬쩍 말을 건넨다. “어디서 오셨어요?” 스페인에서 온 마리아와 마르타라고 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자매의 이름이다. 친자매냐고 물었더니 그냥 친구란다. 마리아는 먹고 있던 간식을 내밀고, 마르타는 과일을 꺼내어 권한다. 이런 건 배가 불러도 받아먹어야 한다. 서로 나누는 맛이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한국에 오면 멋진 식사 한 끼 대접하겠노라고 허세를 떨었다. 웃음을 터트리며 꼭 연락하겠다고 다짐한다.


산길이라 거리를 가늠하긴 어렵다. 채 30분을 못 가서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거룩한 동굴은 아직 멀었다. 여기는 성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도 성 베네딕토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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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의 쌍둥이 여동생의 이름이다. 그녀 또한 오빠를 따라 수녀로 살았다. 그렇다면 이 수도원이 바로 그곳일까. 이름만 듣고는 당연히 수녀원일 줄 알았다. 막상 방문해 보니 남자 수도원이었다.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수도 생활을 했던 장소를 알려주는 자료는 사실상 없다. 연구에 따르면 스콜라스티카는 몬테카시노에서 약 5마일(8km) 떨어진 곳에 은수처를 세웠다. 아마 홀로 또는 한두 명의 동료와 함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비아코와 몬테카시노는 100km 이상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수비아코의 이 수도원은 성녀 스콜라스티카와는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비아코에 12개의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교구 사제와의 갈등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자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성인은 12개 수도원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몇몇 수도승과 함께 몬테카시노로 옮겼다. 그렇다면 이 수도원이 바로 그 12개 수도원 중 하나일까. 그렇게 설명한 자료들이 꽤 있다. 그러나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만일 베네딕토 성인이 직접 세운 수도원이라면 역사적 의미가 달라진다. 베네딕토회 계열의 수도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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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 이 수도원이 베네딕토 이후 꾸준히 존속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유럽의 수도원들은 역사의 격동과 함께 부침을 겪었다. 프랑스 혁명은 교회의 재산을 국민 소유로 선언하고, 거의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를 해체했다. 수녀와 수사들에게는 세속으로 돌아가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이 기간에 수도승들은 이웃 나라 수도원으로 피신하거나 숨어 살며 신앙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더러는 20세기에야 돌아와 수도원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870년 이후 통일 정부는 국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적극 활용했다. 교황령 폐지와 더불어 수도원을 폐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수도원 건물은 정부 청사, 병원, 박물관 등으로 전환되었다. 수도승을 관리자로 남겨두고 수당을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 역사의 모진 발톱에 할퀴지 않고 존속해 온 수도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역시 사라센의 침입과 프랑스 점령기 등 두세 차례 파괴와 폐쇄를 겪었다. 그 기간에 망명 정부 형태로라도 수도 공동체를 유지했을까.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비전문가의 탐색은 이 정도까지가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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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 성당을 찾아 기도부터 하려 했는데 문이 닫혀 있다. 낮에 잠깐 닫았다가 오후 3시 반에 다시 연다고 했다. 입구 정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다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거룩한 동굴을 먼저 방문하고 내려올 때 들러도 될 것 같았다. 이게 큰 실수가 될 줄 몰랐다. 내려올 때는 계곡 쪽으로 돌아 내려오면서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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