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6 끊임없는 기도
새벽 다섯 시에 종이 울렸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착각했다. 아차! 첫 기도인 독서기도 시간이구나. 다급히 성당으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일과표가 생각났다. 독서기도는 다섯 시 반이었지. 아직 30분이 남았구나. 돌아서려는데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성당은 넓고 조명은 어두웠다. 대성전 제단 근처엔 경당도 있고 여러 장식물도 있었다. 그쪽 언저리에서 누군가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낮고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는 것은 결례가 될 것 같아 선 채로 잠시 머물렀다. 누구일까. 이 새벽에 홀로 깨어나 기도하고 있는 저 사람은. 어쩌면 저대로 밤을 새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제 눈이 야경꾼보다 먼저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 (시편 119, 147-148)
방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덩달아 성호를 긋고 눈을 감았다. 소리는 조금 전보다는 또렷이 들렸다. 알 수 없는 짤막한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바치고 있었다. 서너 단어, 또는 네댓 단어로 들렸다. ‘멜레테’라는 용어가 머리를 스쳤다. 고대의 수도승들이 즐겨 바쳤다는 짧고 간결한 기도를 이 새벽에 어느 수도승이 바치고 있구나.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계속 앉아 있어야 했다. 점차 그분의 기도에 빠져들며 마음을 얹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와 노동을 병행하는 사막의 수도 문화는 성경 말씀을 끊임없이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평소 기억해 두었던 짧은 구절, 특히 시편을 반복해서 되뇌는 수행을 ‘멜레테’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멜레테(meléte)는 라틴어 메디타치오(meditatio), 우리말로는 ‘묵상’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되새김질하는 반추동물처럼 반복해서 되뇌는 행위를 의미했다.
오늘날 묵상(黙想)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침묵 속의 생각’이다. 종교적으로는 보통 신앙적 주제에 관한 깊은 생각을 뜻한다. 이것은 고대의 묵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오히려 이런 방식의 묵상을 경계했다. 인간의 생각은 말씀으로 끊임없이 지켜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흐르다가 결국 유혹에 빠지거나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멜레테는 묵상이면서 수행인 동시에 기도이다. 짧은 성구를 반복해서 되뇌다 보면 어느덧 말씀이 영혼 안으로 스민다. 그때 우리 영혼은 충만한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멜레테의 원초적인 형태는 이집트나 시리아 사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일찍부터 짤막한 기도를 즐겨 바쳤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순간에 짧은 기도를 바치도록 권고한다. 유혹과 나태, 분노와 슬픔 등 수도 생활을 위협하는 모든 순간에 보호를 청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가 제시한 짧은 기도는 시편 구절이다.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2)
카시아누스는 이 문구를 언제나 눈앞에 놓아두라고 권고한다. “수도승이면 누구나 갖가지 다른 생각을 쫓아버리고 마음속으로 이 문구를 끊임없이 되뇌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 이 말씀에는 모든 위험을 거슬러 하느님의 도우심을 비는 기원이 포함되어 있고 겸손하고 경건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근심과 끊임없이 나쁜 것을 경계하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1)
카시아누스의 권고는 오늘날 성무일도 속에 자리 잡았다. 각 시간경의 도입부는 이 시편 구절로 시작한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멜레테 수행은 ‘예수기도’라는 형태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동방 정교회 지역에서 예수기도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 활발하다. 한국 정교회가 소개하는 기도문은 이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2)
(Κύριε Ἰησοῦ Χριστέ, Υἱὲ τοῦ Θεοῦ, ἐλέησόν με τὸν ἁμαρτωλόν.)
동방 정교회 안에서 예수기도는 헤시카즘(Hesychasm)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헤시카즘은 고요와 정적(靜寂)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시키아(hesychia)를 추구하는 영성 운동이다. (*3)
헤시카즘은 예수기도를 호흡법과 연결한다. 짧은 기도를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들숨과 날숨에 맞춘 리듬이 생겨난다. 예를 들면 들숨에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날숨에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되풀이하는 방식이다.
헤시카즘은 사막의 수도 영성을 이어받은 그리스 땅 아토스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다. 그리스도교 수도 문화는 사막을 지배한 이슬람의 압박을 받으며 점차 소아시아와 그리스 쪽으로 옮겨갔다. 특히 성산(聖山)으로 불리는 아토스가 수도 영성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아토스는 헤시카즘 영성이 살아 있는 동방 정교회의 심장으로 통한다. 그리스 헌법은 아토스 반도를 수도원 자치주로 선포하고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한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잠시 졸았던가. 독서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짝 떴다. 웅얼거리던 기도 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제대 아래 지하 경당 쪽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검은 실루엣이 잠시 보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하 경당은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수도원 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지 몇 주가 지났다. 청각은 시각보다 오래가는 것일까. 그 새벽에 들었던 낮고 낮은 웅얼거림이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엉겁결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했던 그 시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기도를 잘 모른다. 진심 어린 기도에 맛 들이지 못했다. 기도가 주는 힘과 용기를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 은총으로나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날 나는 쉽고 간단한 기도의 모범을 보라고 불려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성 베네딕토는 가련한 나그네에게 당신의 제자를 통해 기도를 가르쳐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기도가 어렵니? 그냥 저렇게만 해.”
(*1) 『담화집』 10,10 (요한 카시아누스, 진 토마스 역주, 2024, 분도출판사)
(*2) 『예수기도』 (이에로테오스 대주교 지음, 2018, 정교회출판사)
(*3) 『마음의 기도』 (앙리 피에르 링켈 지음, 허성석 옮김, 2013, 분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