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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Jul 07. 2024

0702 장맛비

2024년 여름일기

2024년 7월 2일(화) 비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낮인데도 어둑하고 비 오는 날 특유의 적막함이 돌고 있었다. 창밖의 흔들리는 나무가 비가 오는 걸 연신 증명 중이었다.


점심에 날이 좋을 때도 실내에 있던 나는, 무슨 바람인지 우산을 들고나갔다. 점심때 동료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기로 했는데 비가 쏟아져 취소한 상태라 굳이 안 나가도 되는데 말이다.

길바닥엔 경사를 따라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난 새운동화가 젖지 않게 조심조심 발디디며 하나에게 향했다. 비 오는 날 히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비 오는 날 히나를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이제 비 오는 날도 하나를 만난 경험을 쌓을 수 있구나. 히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짧은 길에도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히나는 실내 작은 창고에 누워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자 슬쩍 눈을 뜨더니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비가 와 다가오지는 못하고 가만히 쳐다보더랬다. 간식을 꺼내 처마 아래쪽에 가져다주자 히나는 간식을 물고 처마밑에서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갑자기 처마밑에서 나와 비를 맞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예뻐해 달라는 건가, 인사하는 건가

이유는 모르지만, 비를 맞으면서 까지 내게 와준 히나가 안쓰럽기도 고맙기도 했다. 히나에게도 우산을 받쳐 주고 쓰다듬어주며 인사했다. 히나는 사람의 손길이 더 그리웠을지도. 간식을 먹지 않고 물고 있는 채로 한참을 있었다. 혹 내가 갈까 봐 불안해서 그러는 건가 싶어, 간식을 먹으라 하고 기다려주었다. 하나는 곧 밥그릇에서 간식을 먹고, 한가득 남아있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새끼가 있을 때는 밥통이 늘 비어있었는데. 입맛을 잃은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밥을 먹고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선 히나에게 남은 간식 하나를 마저 주고, 인사하고 돌아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뒤편 텃밭을 보러 갔다. 장마에 식물들이 어찌 잘 버티고 있는지 궁금했다. 재작년에 텃밭 주변을 벽돌로 둘러 흙이 소실되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런데 벽돌을 너무 잘 쌓았는지 물도 나오지 못해 고랑에 물이 가득했다. 식물들에겐 작은 홍수사태. 벽돌을 살짝 들어 올려 물을 빼주자 작은 틈으로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농부가 되어 물길을 내는 느낌이 이런 건가 하며 뿌듯하기도 했다.




남은 점심시간에 앉아 쉬려고 했는데, 갑자기 외근을 하게 됐다.

그러다 마주한 한 장면. 열심히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된다며 누워 우는 젊은 여성에게, 어머니가 다가와 안아주며 다른 말 없이 “사랑해”라 하셨고, 여성은 미안하다 하고 어머니는 잘했어라며 따뜻이 다독여 주셨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그 어머니의 마음과 온기가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힘든 때 누군가의 따뜻함이면 그게 다 괜찮아진다. 저분은 저런 어머니가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가 생각났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를 위해 주시는 엄마가.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큰 힘이다. 엄마가 나이가 많이 드시고 체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 슬퍼진다.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히 행복하게 사시길 다시 또 바랐다.




복귀해 일을 하는데 단체문자를 보내게 되어 좋은 글귀를 찾아보았다. 장마철에 맞는 내용은 많지 않을 거 같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순간 진하게 다가온 시 하나를 발견했다. 최옥 시인님의 '장마'였다.



장마

              - 최옥


일 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 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장마. 장마는 이런 것이구나... 버릴 것을 버릴 수 있게 해 주길, 채우려는 것에 매달려 허망한 시간을 보내지 않길... 장마가 일 년에 한 번은 꼭 있어야 하겠다 싶었다. 그동안 내가 감성을 잃고 말라가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단체문자로는 짧은 박준 님의 시의 글귀를 보냈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시를 전해주고 싶다 생각했다.




오후 4시 반 즈음, 축하화분용 리본이 필요해 갑자기 화원에 가게 되었다. 사장님이자 원예치료사이신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님이 수박을 주시며  먹고 가라 하셔서 감사히 넙죽 받아먹었는데, 푸른 식물에 둘러싸여 먹으니 마치 계곡에 있는 거 같았다. 장마가 끝나면 이제 수박이 맛이 없을 거라고 작은 대화가 오고 갔다. 리본을 사서 돌아가려는데 선생님이 커다란 수박 반통을 챙겨주시며 나눠먹으라 하셨다. 화원에 올 때마다 챙겨주시는데 오늘도 또 크게 받아버렸다.


화원에서 나와 차를 타러 가는데, 화원 바로 옆에 선생님이 키우시는 풍산개인 은동이가 있었다. 원래 맞은편 하우스에 은동이 집이 있었는데, 장마라 옮겨 주셨나 싶었다.

은동이가 평소에는 꼬리를 흔들며 일어나 반겨주곤 했는데, 이사한 집이 낯설어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멀뚱히 앉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니 '나를 안 보고 그냥 가는 거예요?'라 말하는 거 같았다. 다음에 간식을 가져다줘야지.



쏟아지는 비, 히나, 텃밭 가꾸기, 누군가의 눈물과 위로, 시, 수박, 은동이.

장맛비와 함께 했던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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