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음악 사이의 골짜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라고 할 경우 우리는 흔히 그것을 소유하는 나 자신도 그리고 그 소유의 대상도 영속적으로 존재하기를 암암리에 희구하고 있다. 그런데 소유 양식에서 나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사회적 지위, 특정한 성격, 명예 등등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나 자신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육체의 미라화에 의한 육체적 불멸과 유언과 명성에 의한 정신적 불멸의 시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로 자신의 불멸을 모색해 왔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박찬국, 세창미디어-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을 읽으며 문득 나는 왜 음악을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음악을 하는 것은 음악을 소유의 관점에서만 보고 하는 것은 아닐까? 유언과 명성 같은 정신적 불멸처럼 음악도 '내가 소유한 음악'이 되어 '내가 만든 음악의 영속이 곧 나 자신의 영속'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었음은 아닐까?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기억될 음악을 남기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불멸에 대한 모색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것은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내가 소유한 것으로서의 나'인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망은 소유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연주한 좋은-나도, 너도, 후세 사람들도 만족할 만한-음악으로 나의 정체성과 존립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와 음악사이에는 매우 큰 골짜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음악 자체로 행복해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모두가 찬탄하는 연주를 하는(혹은 소유한) 내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왜 나는 음악 자체로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가 음악을 소유해야 할 것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엉망진창인 연주를 하고도 음악 자체로 만족한다며 행복해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엄밀히 음악을 연주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연주라는 것은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우 객관적이기도 하다. 일정 수준 이하의 연주를 연주라 부를 수 없고, 그것이 만들어 낸 음들을 좋은 음악이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을 전공한 것 아닌가.(물론 전공이 일정 수준 이상의 연주를 절대 보증하지 않는다.)그래서 나는 그저 나의 소유인 음악 연주가 좋은 것이기만 바랐다. 음악 자체로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 곧 나는 이것으로 나의 영속성을 만들어 내는데 골몰했다. 그래서 나는 매 연주에 일희일비했다. 연주가 그나마라도 좋았다고 생각되면 즐거워했고(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좋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괴로워하고 자책했다. 연주자로서 연주의 결과에 민감한 것은 당연하다. 연주를 다시 복기하며 좋은 부분과 좋지 않은 부분을 되돌아보는 것은 다음 연주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다. 그렇지만 소유의 관점에서만 보는 연주는 결국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나=연주의 공식이 성립되면서 나의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 연주에 따라 내가 '좋은 나'가 되거나 '좋지 않은 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나와 음악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다.
연주에 골몰한 나머지 음악을 보지 못하고 오해해 버린 것이다. 좋은 음악은 좋은 연주에서 나온다. 음악은 연주되지 않고는 세상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연주를 할 때 나의 연주를 통해 음악은 나오지만, 그것은 나를 통해 나온 것이지 내 존재 자체는 아니다. 물론 내가 연주를 했기에 나의 사상, 감정, 실력, 생각이 들어있을 것이다. 내가 음악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할 때 발음이 부정확하면 어떤가. 듣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내가 잘 훈련된 테크닉과 잘 정제시킨 감정으로 연주하면 듣는 사람에게 잘 전달될 것이다. 내게 있어 연주는 이 한계를 넘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잘 연주는 이 선을 넘어 나와 동일시되기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흔들렸다. 그리고 음악마저 부담스러워졌다. 골짜기는 더욱더 깊어졌다.
나=연주가 아니고, 나=음악도 아니다. 내가 소유의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나와 연주와 음악이 분리된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이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연주가 오늘은 좀 그랬어. 그렇지만 괜찮아. 다음에 더 잘 하자.' 이렇게 금방 털고 다시 한걸음 더 뗄 수 있다. 연주가 마음에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은 좀 연주가 되네. 좋아. 만족하자. 특히 이 부분이 좋았던 것 같아.' 하고 좋은 연주도 털고 다시 한걸음 더 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중심을 잡고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진짜 음악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주는 행복한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음악과 나 사이에 골짜기도 조금씩 메워질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음악이라는 존재에 행복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불멸하지 않으면 어떤가. 지금 내가 내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 존재 자체에 행복하다면. 그리고 음악이라는 존재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