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세상
양자는 갈림길을 보고 울었다.
남쪽으로 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묵자는 하얀 명주실을 보고 울었다.
노란색으로도 검은색으로도 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안, 회남자 -
나는 이 고사에서 수많은 선택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혹은 둘 다 일수도 있다. 내 인생에서도 여러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중 가장 큰 선택의 순간은 초등학생 때 찾아왔다. 음악을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실현시킬 악기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클라리넷? 세상에는 수많은 악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선택한 악기가 리코더였다. 자, 이제 양자는 내가 선택한 길을 보고 울까, 웃을까? 묵자는 내가 물들인 명주실을 보고 울까, 웃을까? 그럼 나는 어떨까? 나는 울었다, 웃었다 한다. 리코더를 선택한 때부터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내면에서, 외면에서 찾아왔다. 내 명주실은 노란색이었다가 검은색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악기를 잡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평생을 바쳐온 것이라 그럴 것이고, 내게 가장 익숙한 것이라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이 악기가 주는 행복한 순간을 놓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주 가끔 연습 중에 음악의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들게 연주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순간의 연주를 기억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끝까지 가져가는 경우도 있고 다시 재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이다. 리코더라는 악기로 음악을 만들어내고 그 음악이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이 악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 기쁨은 행복이 되고 그 순간을 또 느끼고 싶어서 다시 악기를 잡는다. 이것이 내가 리코더라는 악기를 선택하고 웃는 때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내게는 웃는 때보다 우는 때가 더 많았다.
이 악기로 인해 우는 때가 더 많음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다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리코더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아아들이 부는 수행평가용 악기. 리코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런 편견 때문에 리코더는 '쉬운 악기'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어떤 악기가 됐건 세상에 '쉬운 악기'는 없다.) 거기에 더해 가끔 리코더가 악기 취급도 못 받을 때도 있다. '리코더가 악기예요?'라는 질문 앞에서는 차라리 '리코더가 뭐예요?'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본다. 그만큼 리코더에 대한 인식은 실제 리코더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났을까. 리코더가 가진 그 유수한 세월과 아름다운 음색, 연주 주법, 연주곡들은 교육용 악기라는 선입견을 쉬이 깨지 못한다. 불면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그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교육용으로 선택된 리코더는 사실 의외로 소리를 잘 내기 힘들고, 운지와 주법이 까다롭다. 호흡을 불어넣으면 소리가 나는 것은 리코더가 가진 큰 장점이며 특징이다. 그것은 리코더의 구조가 소리 내기 수월하게 디자인되었다 뜻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그저 불면 소리 나는, 연주하기 쉬운 악기로만 인식되어 오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세상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쉬운 일이 없듯이, 잘해보려 하면 리코더도 또한 어려워진다. 그러나 오랜 세월 대중에게 알려진 진짜 리코더의 모습이 워낙 미미해서 여전히 리코더는 쉬운 악기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최근엔 국내에도 수준 높은 리코더 연주자들이 많아졌고 가끔 대중매체를 통해 리코더 연주가 전파를 타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모 예능 프로그램에 리코더 연주자가 나와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어 화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큰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다가 사라지듯 금방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로 각인되지 않는 것이다. 리코더를 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의외로 넓어서 프로 연주자에서부터 아마추어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리코더를 하는 모두에게 리코더에 대한 이런 편견은 크나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리코더 연주자라고 하면 리코더로 무슨 연주를 할 수 있냐는 의구심이, 취미로 배우는 악기가 리코더라고 하면 '왜 하필 리코더야, 다른 악기도 많은데.'라는 핀잔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 모든 것은 대중에게 리코더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악기가 어떤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막상 리코더를 연주하면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연다. 리코더가 이런 소리가 나는 악기인 줄 몰랐다는 감상부터 리코더로도 이런 곡을 연주할 수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는 고백 아닌 고백까지. 이런 때는 리코더의 진정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 준 듯 해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늘 리코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리코더 연주자의 수나 리코더를 좋아하고 즐기는 인구가 타 악기에 비해 적다는 것도 문제다. 리코더를 듣고, 배우고 연주하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리코더는 더 널리 알려질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리코더를 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기만 한다. 이것이 비단 리코더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리코더를 향유하는 사람들, 그들이 리코더의 깊은 뿌리가 되고 그 뿌리로부터 더욱 수준 높은 리코더 문화가 생겨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코더를 하는 인구수에 비해 좋은 연주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비율은 프로나 아마추어 연주자를 가리지 않는다.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리코더 연주자들이 생겨났고, 또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연주 수준이 높고 열정적인 좋은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속속 생겨났다. 리코더 인구를 배양하는 토양이 그리도 척박했건만, 열매는 단단하다. 리코더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한국 리코더계는 더욱 성장하고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당장은 그들 모두 리코더라는 악기를 선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수많은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명주실을 어떤 색으로 물들일지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진짜 리코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 보람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리코더의 진짜 소리에 놀라고 리코더가 만든 음악에 놀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세상은 리코더에서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다. 리코더로 헨델, 바흐, 텔레만, 비발디, 로이에, 마르첼로 등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다. 취미로 리코더를 배우는 게 핀잔 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리코더 앙상블을 하는 세상. 리코더를 진지한 악기로 인식하고 듣고, 즐기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온다면 양자나 묵자도 내 선택을 보고 울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