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종소리
우리는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깨어 활동한다. 그런데 깨어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않은 상태. 우리는 일상의 모든 활동을 마치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수행한다.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타성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둡고 으슥한 골목을 목적 없이 배회하는 유령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오감을 얼마나 잘 사용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우선 나부터도 무감하게 살고 있다. 나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중한 능력을 쓰지 않고 묵혀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반쯤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어떤 강한 자극이 오면 그때서야 조금 놀라며 감각을 사용한다. 그래서 자극적인 뉴스들이 넘쳐나고 우리의 입맛도 점점 더 강한 양념을 선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우리는 또다시 무감각해지고 무미건조해진다. 마음속 한편에서 희미하게 나는 진짜 살아있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르다가 다시 깊이 잠겨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을 보내고 있다.
예술은 나를 잡아 끝없이 유령처럼 무감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현실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것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려다주며 생의 감각을 일깨워 준다. 그것으로 나는 나의 삶을 실감한다. 그것은 - 예술은 나를 깨우는 종소리이다. 미학자 문광훈은 자신의 책에서 "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예술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경험에서 오는 감각의 쇄신 때문이다. 감각의 쇄신은 삶의 쇄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예술이 나를 깨우고 나의 감각이 새롭게 깨어나고 나의 삶이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더 넓어진 세계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게 된다. 바흐의 푸가를 들을 때면 나는 세상도 이 4 성부의 대위법처럼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성부가 수직으로나 수평으로나 서로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우러지듯, 세상도 여러 이면이 있고 때로는 불협화로, 때로는 협화로 어우러진다. 보이는 이면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삶에 대한 생각도 조금 넓어진다. 나는 램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며 위로받는다. 그의 말년의 자화상은 허허 웃으며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라고 묻는 듯하다. 또는 고흐의 불타오르는 듯한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너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나? 실패할 각오는 되어있고?' 예술은 때로는 고요히 부드럽게, 또는 번개처럼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 물음은 곧 나에게 행동할 것을 재촉한다. 너의 삶을 살라고.
잠자던 나의 오감도 예술을 통해 깨어난다. 로이에의 리코더 소나타 중 아다지오를 들으면 일정하게 울리는 베이스 선율은 멀리서 들리는 땅울림 같다. 이 소리는 곧 내 심장박동과 하나가 되어 울린다. 그리고 베이스 선율 위로 주선율이 축축한 봄비처럼 내리면 베이스와 주선율 사이의 화음이 서로를 감싼다. 이로써 이 첫 소절은 곧 봄비가 내려 땅을 적신 후 나는 흙 내음 같아진다. 그 사이에도 땅울림 같은 베이스 선율은 나직이 울린다. 하나의 음악이 주는 한 소절도 이렇듯 많은 감각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 먼저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곧 일상에서 적용된다. 길을 걸으며 가로수의 잎새가 어제보다 더 자란 것이 눈에 들어오고, 버스 정류장 근처의 풀숲에서 참새가 명랑하게 지저귀는 것을 즐겁게 듣는다. 새로 나는 여린 입새를 보며 치친 마음이 위로받는다. 그리고 그 작은 잎새로부터 내 마음도 같이 녹색으로 물든 듯 새롭게 힘을 얻는다. 이럴 때면 나는 매 순간을 밀도 있게 실감한다.
우리가 리코더를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연습 중에 혹은 연주 중 어느 한순간 리코더가 만들어 낸 음악이 마치 차원을 찢듯이 새로운 감각으로 물밀듯 밀려올 때가 있다. 아주 잠깐 우리가 평소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찢어진 차원의 틈으로 새어 나온 것처럼 말이다. 또는 늘 연습하던 선율도 새롭게 들리고, 그럴 때는 내가 이 곡에 좀 더 익숙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같은 곡이어도 이 곡에 대한 내 지평은 더 넓어진다. 이런 이유로 리코더를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많다. 새 지평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 과정을 견디고 그 곡이 주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무던 이도 노력한다. 이 노력은 시간이 지나서 작은 결실로 맺어진다. 또 이 작은 결실이 모여 큰 결실을 이루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어느새 처음에 리코더를 시작했던 때와 지금이 달라져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리코더를 하는 기쁨을 발견하고 삶은 더 이상 무미건조해지지 않는다. 음악에 집중하는 순간순간이 충실하게 흘러가고 나의 온 감각과 지각을 사용하여 리코더를 연주한다. 온몸의 근육은 손가락을 움직이고, 호흡하고 악보를 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음악을 하는 순간은 이렇듯 내가 가진 능력을 온전히 다 사용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삶의 충실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예술은 잠든 나를 깨우고 나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온 지각과 감각을 사용해서 주어진 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 문광훈/ 미학 수업/ 흐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