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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영 Apr 11. 2021

예, 나는 리코더 연주자입니다.  3

너의 이름은.

  세상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이 이름들은 어느 한 사물이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각종 동식물이나 형이상학적인 사상이나 초월적인 존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나에게도 이름이 있다. 우리 각자에게는 주어진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곧 '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불릴 때도 있다. 그러면 곧 그 호칭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나 황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내가 가진 역할과 직업, 나이 등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리코더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이 '리코더'라는 명칭은 이 악기를  가리키는 수많은 이름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이름들이 생겨난 데에는 오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이 있다. 리코더란 무엇인가. 이 악기는 무슨 악기인 걸까. 사전적으로 분류해 보자면 리코더는 관악기에 속해있다. 휘슬 마우스피스(whistle mouthpiece)-혹은 블록(block)-를 가진 세로형 피리로, 뒷면에 한 개, 앞면에 7개의 구멍이 나있는 원통형 목관악기이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리코더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이 악기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리코더는 원래 나무로 만들었지만, 20세기에 합성수지의 발명으로 플라스틱으로도 제작되었다. 즉 플라스틱 리코더는 20세기에 들어와 생긴 것으로 그전까지는 나무가 리코더의 주요 재료였다. 이 악기는 유럽에 중세시대에 만들어져서(혹은 전파되어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가장 대중적인 악기가 되었다. 그 후 고전-낭만시대에는 대중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다가 20세기 초 고음악 부흥운동과 맞물려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는 교육과 아마추어를 위한 악기일 뿐 아니라 전문적인 연주를 위한 악기로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리코더'라는 명칭은 영어 동사 'record'에서 왔다. 이 동사는 '리코드'라고 발음되며 '기록하다, 기억해 내다, 상기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record의 어원은 '마음에 환기하다, 기억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recordari'에서 왔다.  즉 리코더 recorder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음악학자 데이비드 라소키(David Lasocki)에 따르면 민스트럴(minstrel)이나 민스트럴의 악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민스트럴은 중세 유럽에서 봉건 귀족에게 봉사하거나 여러 지방을 떠돌던 직업 연예인이었다. 특히 악기를 연주하는 세속 음악가를 뜻하며 현재는 음유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은 시를 읊기도 했으며, 때로는 시에 맞춰 악기도 연주했다. 이들이 주로 연주하던 악기 중 하나가 리코더였기 때문에 이 'recorder(이야기하는 사람)"가 현재의 리코더를 뜻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리코더라는 명칭이 악기로서 처음으로 쓰인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388년 더비 백작(후에 헨리 4세)의 가계 장부 기록에  리코더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영문학에서는 리코더라는 용어가 존 리드 게이트(영국의 수도사, 궁정 시인)가 1431년에서 1438년 사이에 쓴 서사시 '왕후의 몰락(The Fall of Princes)'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 리코더를 뜻하는 명칭은 플루트(flute)였다. 독일에서는 Fleite(플라이테)나  Flöte(플뢰테)로,  프랑스에서는 flute(플뤼뜨), 네덜란드에서는 fluyte(플뤼테?)로 쓰였다. 이탈리아에서도 flauto(플라우토)나 fiauto(피아우토)로, 스페인에서는 flauta(플라우타)로 리코더를 불렀다.  1530년 초부터 형용사를 덧붙여 부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세 리코더와 르네상스 리코더는 구멍이 9개가 나 있다고 해서 fleute a neufte trous(9개의 구멍이 있는 플루트)라고 부르거나 바로크 리코더는 flauto da 8 fori(8개의 구멍이 있는 플루트)라고 불렀다. 리코더를 수직으로 세워 불기 때문에 flauto diritto(세로 플루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코더의 소리에서 딴  fluste douce,  flauto dolce,  flauta dulce(감미로운 소리의 플루트)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영국과 관련해서 fluste d'Angleterre, litui anglicani(영국 플루트)라고  부르거나 이탈리아와 관련해서 flauto italiani(이탈리아 플루트)로 부르기도 했다. 악기의 취구 형태에 따라 Blockflöte(블록이 있는 플루트)나 flûte  à bec, flauta bocca(부리가 있는 플루트)로 불렀다. 혹은 소프라노 리코더가 한 손에 쥐기 쉽다고 해서 handfluit(손 플루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리코더는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리코더는 중세 민스트럴의 악기를 거처 르네상스 시대에 콘소트 악기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특히 영국에서 비올 콘소트와 더불어 리코더 콘소트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1673년에 이르러 유럽 대륙으로부터 바로크 리코더가 프랑스의 전문 연주자들을 통해 영국으로 도입되었다. 이때  리코더를 이르는 명칭인  flute douce 혹은 간단히 flute라는 이름도 같이 전해졌다. 이로써 적어도 1695년까지 새로운 명칭과 전통적인 명칭이 혼용되어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1673년부터 1720년대 후반까지  영국에서 플루트(flute)는 항상 리코더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1720년대 이후 가로 플루트(transverse flute)가 점점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명칭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리코더는 common flute(커먼 플루트) 또는 common English-flute(커먼 잉글리시 플루트)로 불렸으나  후에는 더 간단히 English flute(잉글리시 플루트)로 줄여서 부르게 된다. 그리고 가로 플루트는 German flute(저먼 플루트)나  flute(플루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명칭의 변경을 보고 있자면  마치 이 플루트(flute)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라도 치러진 것만 같다. 리코더나 가로 플루트 모두 가장 단순한 이름인 플루트라고 불릴 때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플루트라는 명칭을 쓴다는 것 자체가 대중의 인기가 반영된 것이었다.(현재는 이 플루트라는 명칭을 모던 플루트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 명칭이 다른 명칭으로 바뀌는 것은 무 자르듯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략 1765년까지 플루트를 리코더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20세기로 들어와 리코더를 의미하는 명칭은 대략 이렇게 좁혀지게 되었다.

영어: 리코더 recorder

독일어: 블록블뢰테 Blcokflöte(블록이 있는 플루트)

프랑스어: 플뤼떼 아 베끄 flûte a bec (부리가 있는 플루트) / 플뤼떼 두스 flûte douce(감미로운 소리가 나는 플루트)

이탈리아어: 플라우토 아 베코 flauto a becco(부리가 있는 플루트) / 플라우토 돌체 flauto dolce(감미로운 소리가 나는 플루트) / 플라우토 디리토 flauto diritto(세로 플루트)

네덜란드어: 블록플라우트 blockfluit(블록이 있는 플루트)

스페인어: 플라우타 데 피코 flauta de pico(부리가 있는 플루트) / 플라우타 둘체 flauta dulce(감미로운 소리가 나는 플루트)


이밖에도 리코더의 크기에 따른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용어들도 나라와 지역별로 각각 차이가 있었고 표준적인 이름은 현대에 와서야 조금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작은 크기의 리코더를 알토 리코더를 기준으로 이름 붙였다. 알토 리코더의 최저음인 F4에서 완전 5도 위인 C5 소프라노 리코더는 fifth flute(다섯 번째 플루트)라고 불렸다. 마찬가지로 third flute(최저음 A4), sixth flute(최저음 D5), octave flute(최저음 F5)등으로 각각 다른 크기의 리코더를 불렀다. 나라 별로 이름은 같아도 다른 크기의 리코더를 가리키는등 용어가 정리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아널드 돌메치(Arnold Dolmetsch)가 리코더의 크기별 용어를 영국식으로 정리했다. 즉, 소프라니노(sopranino), 데스칸트(descant), 트레블(treble),  테너(tenor),  베이스(bass)로 지칭한 것이다. (데스칸트는 소프라노 리코더를, 트레블은 알토 리코더를 가리킨다.) 하지만 최근에는 크기가 큰 리코더가 새롭게 생기면서 베이스 리코더는 basset(바세트)로, 그레이트 베이스(great bass)는 베이스로, 콘트라 베이스(contrabass)는 그레이트 베이스로,  숩콘트라베이스(subcontrabass)는 콘트라 베이스로 각각 불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름의 혼용과 그에 따른 혼란은 비단 리코더의 이름과 관련해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악기에서 공통되게 나타난다. 특히 역사가 오랜 악기일수록 혼란은 더욱 커진다. 리코더는 선사 시대까지 그 기원이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유구한 세월을 인간과 함께 하면서 여러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름만 여러 개 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 모습까지 조금씩 변하면서 오늘날 가장 흔한 악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나를 이르는 많은 호칭이 있어도 나의 이름, 곧 자아를 가진 '나'는 하나이듯 리코더도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들을 거쳐 변형되어 왔어도 이 악기의 진정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듣는 사람의 영혼에까지  직접 맞닿는 소리의 힘이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리코더를 연주하며, 그 소리를 듣고, 이 악기가 만들어낸 음악에서 기쁨과 위로를 얻는다. 너의 이름은 결국, 기쁨과 위로이다.   




참고

David Lasocki, http://www.oxfordmusiconline.com/subscriber/article/grove/music/23022 중 1. Nomenclature 인용

https://en.wikipedia.org/wiki/Recorder_(musical_instrument)#References

https://www.recorderhomepage.ne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47450&cid=60476&categoryId=60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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