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영혼의 무게

힘의집_part1 금지된 감각

by 방덕 김주현

**작가의 말: 심각한 설정오류를 발견해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어쩔수없이 6화를 재연재합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멸균된 복도의 이단자

모션랩 제1 회의실의 육중한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는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쉬익’ 하는 공압의 빠짐과 함께, 요엘의 등 뒤에서 세계의 절반이 썩은 과일처럼 도려내지는 단절의 소리였다. 문 틈새가 완전히 맞물려 ‘딸깍’ 하고 잠기는 그 0.5초의 순간, 요엘은 자신의 척추를 타고 내려가던 서늘한 진동이 발뒤꿈치 끝에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회의실 내부를 가득 채우던 그 멸균된 침묵. 그리고 민 현장관의 아크릴 가면 너머로 번뜩이던, 감정이라곤 거세된 정제된 살의. ‘안정화 계획’이라는 매끄러운 단어로 포장된 폐기 선고는 요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이 환청처럼 귓바퀴를 맴돌았다. 협조? 아니, 그것은 복종에 대한 확인 도장일 뿐이었다.

요엘은 복도로 나섰다. 평소라면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을,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강화 플라스틱 바닥이 오늘따라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인간의 보행 효율을 극대화하고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최적의 마찰계수(0.6μ)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요엘의 발바닥은 그 인공적인 친절함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요엘의 발을 밀어내는 듯한 미세한 척력이 느껴졌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끼리 억지로 맞닿은 것 같은 불쾌한 저항감이었다.

시야 위로 네메시스의 인터페이스가 끊임없이 정보를 투사했다. [현재 위치: 모션랩 B구역 4번 통로] [보행 속도: 1.1m/s - 표준 대비 0.1m/s 느림] [권장 사항: 다음 업무 복귀를 위해 보폭을 5cm 넓히십시오] [심박수: 98bpm - 약간의 상승세 감지]

푸른색 글자들이 망막을 어지럽혔다. 요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글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요엘의 시신경 위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젓고 싶었다. 저 빌어먹을 글자들 뒤에 숨어,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고 있을 민 현장관의 시선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걷지 마. 걷는 순간 패턴이 읽혀.’

요엘의 내면 깊은 곳, 폐 안쪽의 뜨거운 점이 경고를 보냈다. 그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걸을 수도 없었다. 오른쪽 다리를 내디디려던 찰나, 허벅지 안쪽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47구역 지하에서 보았던 그 사내의 움직임, 궤적의 방에서 겹쳤던 빛나는 선들이 근육 메모리에 잔상처럼 남아 간섭을 일으키고 있었다.

요엘은 비틀거렸다. 아주 미세한 비틀거림이었다.

“주의. 보행 밸런스 3% 우측 편향 감지. 피로 누적입니까?”

네메시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니.” 요엘이 작게 뇌까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신발 끈이... 헐거워서 그래.”

“당신의 신발은 자동 조임 기능이 탑재된 모델입니다. 끈 풀림 확률은 0.00%입니다. 거짓 정보 입력은 정신 건강 지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거짓말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 요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맛이 났다. 그는 복도 벽면에 설치된 거울 패널을 스쳐 지나가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그리고 공포와 결의가 뒤섞여 흔들리는 눈동자. 그것은 도시가 정의하는 ‘안정된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복도 끝 모퉁이에서 미세한 구동음이 들려왔다. 위잉, 틱, 위잉. 내부안정국의 순찰 드론이었다. 민 현장관이 보낸 감시자일까? 아니면 일상적인 순찰일까? 요엘의 심장이 흉곽을 뚫고 나올 듯이 요동쳤다.

‘지금 마주치면 끝이다.’

요엘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문을 찾았다. [위생 시설 - 남성용]. 화장실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거울 속의 이방인

화장실 문은 요엘이 들어서자마자 소리 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닫혔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문틈의 고무 패킹이 밀착되며 외부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동시에 천장의 센서가 요엘의 입장을 감지하고 내부 정화 시스템을 가동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섞인 멸균 공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요엘에게는 그것이 시체 방부제 냄새처럼 역겨웠다.

화장실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시각적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이라고 선전되었었다. 카메라는 없었다. 적어도 렌즈가 달린 형태의 카메라는 없었다. 하지만 요엘은 알고 있었다. 감시직으로 일하며 수천 번도 더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프라이버시란 오직 ‘영상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었다.

변기에 설치된 생화학 센서는 대소변의 성분을 분석해 영양 상태와 스트레스 지수를, 타일에 내장된 압력 감지기는 체중 변화와 자세 불균형을, 세면대의 스마트 미러는 동공 반응과 안색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중앙 서버로 전송하고 있었다. 이곳은 휴식처가 아니라, 가장 은밀한 데이터를 채굴하는 채굴장이었다.

요엘은 세면대 앞으로 비틀거하며 다가갔다. 하얀색 인조 대리석 상판은 차가웠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 센서 아래 손을 댔다. 물은 정확히 24도를 유지하며 흘러나왔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드는 미지근한 온도.

요엘은 양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들자, 스마트 미러 표면에 푸른색 데이터 링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요엘, 아니 ‘요엘-5739’의 얼굴 위로 분석 결과가 실시간 자막처럼 떠올랐다.

[안면 근육 긴장도: 극심] [동공 확장: 4mm (표준 대비 1.5mm 초과)] [피부 전도도: 급상승 (식은땀 분비 과다)]

“요엘-5739.”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거울 스피커에서 울렸다. 평소의 비서 같은 톤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경고의 톤이었다.

“심박수가 분당 135회로 급증했습니다. 호흡 패턴의 진폭이 불규칙하며, 과호흡 징후가 보입니다. 현재 당신의 상태는 업무 부적합 판정을 넘어, ‘급성 생체 이탈’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닥쳐...”

“내부안정국 의료팀에 긴급 상태 보고를 전송할까요? 이것은 권고가 아니라 의무 프로토콜입니다.”

“보내지 마!” 요엘이 소리쳤다. “그냥... 잠시 어지러워서 그래. 아침을 안 먹어서...”

“영양 부족으로 인한 반응과는 패턴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네메시스는 냉정했다. “거부 사유를 입력하십시오. 20초. 20초 내에 지표가 정상 범위로 회복되지 않을 경우, 강제 안정화 프로토콜이 활성화됩니다. 벽면 수납장의 진정제 투여 캡슐이 개방될 예정입니다.”

20초. 벽면에 내장된 의료함의 잠금장치가 지잉-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는 요엘의 의지를 꺾고 강제로 수면에 빠뜨릴 고농도 진정제가 장전된 주사기가 들어있을 것이었다.

요엘은 거울을 노려보았다. 증강현실 렌즈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 주변으로 빨간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시스템은 그를 ‘사람’이 아니라 ‘고장 난 부품’으로, 수리하거나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15초.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공포가 혈관을 타고 전신을 마비시키려 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여기서 주사를 맞고 쓰러지면, 눈을 떴을 때는 47구역의 폐기물 처리장이거나, 기억이 소거된 채 재배치된 낯선 책상 앞일 것이다.

‘안 돼.’

요엘은 세면대 가장자리를 꽉 쥐었다. 대리석이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르스름해졌다.

그때였다. 47구역 지하에서 느꼈던,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던 그 미세한 진동. 그리고 푸라나 인터페이스를 통해 보았던 ‘금지된 움직임’의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숨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요엘은 지금 숨을 가슴 상단, 쇄골 근처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질린 짐승의 호흡이자, 도사가 허용한 패배자의 호흡이었다.

10초. 요엘은 눈을 감았다. 외부의 시각 정보를 차단했다. 그리고 의식을 몸의 내부, 텅 빈 흉곽 안으로 돌렸다.

‘내려야 한다.’

그는 숨을 멈췄다. 아니, 공기를 들이마시는 행위를 멈추고, 이미 들어와 있는 공기를 폐의 가장 밑바닥, 평소라면 결코 쓰지 않았을 하부 횡격막 근육 쪽으로 강하게 밀어내렸다.

마치 피스톤을 내리누르듯이.

꾸욱.

명치 끝이 뻐근해졌다. 갈비뼈가 좌우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 길게 늘어나는 기괴한 감각이었다. 복부 압력이 급상승하며 척추 안쪽을 밀어 올렸다.

‘숨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향을 바꿀 뿐이다.’

5초. 명치 끝의 뜨거운 점이 폭발하듯 전류를 내뿜었다. 그 전류는 신경계를 타고 내려가 전신의 관절을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두둑 소리를 내며 뒤로 젖혀졌고, 굳어있던 골반 기저근이 풀리며 무게 중심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척추 마디마디가 쇠사슬처럼 풀렸다가, 다시 팽팽한 장력으로 조여졌다. 뼈와 뼈 사이가 벌어지는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3초. 그 순간, 요엘이 눈을 떴다.



시스템의 눈이 멀다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물리적인 ‘오류’였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네메시스의 푸른색 인터페이스가 마치 잡신호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처럼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깨지고, 겹치고, 뒤집혔다.

[식별 오류: 생체 데...터 불일...] [알고리즘 분석 지연: 비...간형... 패턴... 감지...] [경고: 개체 인식률 0.01%... ERROR...]

표준적인 인간의 데이터만을 학습해온 도시의 AI에게, 요엘의 지금 상태는 더 이상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횡격막을 극한으로 내려 장기를 압박하고, 척추를 인위적으로 늘린 상태의 생체 신호는 네메시스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것이었다.

네메시스는 혼란에 빠졌다. 눈앞에 있는 대상을 ‘요엘-5739’로 인식해야 할지, 아니면 센서 오작동으로 인한 ‘데이터 노이즈’로 처리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시스템... 재... 부... 팅... 사용자... 확인... 불가...”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찢어진 스피커 소리처럼 지직거렸다. 벽면 의료함의 잠금장치가 열리다 말고 턱 하고 멈췄다.

0.1초. 그리고 다시 0.1초.

시스템이 요엘이라는 존재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산을 반복하는 그 찰나의 공백. 요엘은 이것이 감시직으로 근무하며 수없이 보아왔던 ‘미분류 로그’의 실체임을 깨달았다. 오직 표준을 벗어난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스스로 눈을 감는 0%의 사각지대.

‘지금이다.’

요엘은 숨을 뱉지 않은 채, 그 팽팽한 장력을 유지하며 화장실 칸막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모순적인 감각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한 통제 하에 있었다.

그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복도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고해상도 감시 카메라들이 일제히 위잉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

하지만 붉은색 녹화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AI의 시각 처리 장치에는 지금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는 존재가 인간의 형상을 한 ‘움직이는 그림자’ 혹은 ‘렌즈에 묻은 얼룩’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표준 보행 궤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규칙한 리듬,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낮은 무게 중심과 긴 보폭.

요엘은 달렸다. 아니, 미끄러졌다. 발바닥이 바닥을 차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움켜쥐고 당기는 듯한 기묘한 주법이었다.

“비상! 비상! B구역 4번 통로, 미확인 물체 이동 감지!”

복도 스피커에서 경보음이 울렸지만, 그것은 ‘침입자’ 경보가 아니라 ‘시설물 오류’ 경보였다. 요엘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복도 구석, 청소용 드론들이 충전을 위해 드나드는 좁은 환기 슬롯 앞에 멈춰 섰다. 도면에는 그저 ‘배수구’라는 한 줄의 텍스트로만 표시된 곳. 도시의 화려한 조명 뒤편에서 생성된 오물과 폐수가 빠져나가는 어둠의 구멍이었다.

요엘은 슬롯의 금속 덮개를 양손으로 잡았다.

“으으윽...”

평소라면 결코 열리지 않았을 강력한 자석 잠금장치였다. 인증 키가 없으면 500kg의 장력으로 닫혀 있는 문. 하지만 지금 요엘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압 프레스였다. 횡격막에서 시작된 압력이 등 근육을 타고 어깨로, 그리고 팔뚝으로 전달되었다.

끼기긱-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자석이 억지로 떨어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요엘의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팽팽해진 전신 장력이 고통이라는 신호조차 차단하고 있었다.

쾅!

덮개가 뜯겨 나갔다.

슬롯 안쪽에서 훅 하고 올라오는 서늘하고 비릿한 바람. 썩은 물 냄새와 녹슨 철의 냄새.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수직의 낭떠러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그곳은 죽음의 구덩이나 다름없었다.

요엘은 그 어둠을 응시했다. 네메시스의 빛이 닿지 않는 곳. 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거기서 멈춰, 요엘!”

그때였다. 복도 저편, 자동문이 열리며 민 현장관이 뛰쳐나왔다. 그의 뒤로 무장한 보안 요원들이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쇄도했다.

스피커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민의 날것의 육성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기록되지 않는 존재는 죽음과 같다! 지금 그곳으로 뛰어내리면 너는 영원히 유령이 될 뿐이야! 돌아와!”

민은 이미 자신의 단말기에서 요엘의 생체 신호가 소멸했음을 확인하고, 물리적인 눈으로 그를 쫓아온 것이었다. 요원들이 든 서치라이트 불빛이 요엘의 등을 핥았다. 하지만 벽면에 설치된 자동 조준 터렛들은 여전히 요엘을 조준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며 웅웅거릴 뿐이었다. 기계는 민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계의 눈에 저곳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요엘은 슬롯 입구에 위태롭게 서서 마지막으로 민을 돌아보았다. 아크릴 가면을 벗어던진 민의 얼굴은 당혹감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기록되지 않기에...”

요엘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복도의 소음에 묻혀 민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요엘은 스스로에게 선언하듯 내뱉었다.

“...비로소 살아있는 겁니다.”

요엘은 몸을 굽혀 좁고 축축한, 도시의 항문과도 같은 구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수직의 묘지

중력이 요엘의 발목을 낚아챘다.

허공에 몸이 붕 뜬 순간은 아주 찰나였지만, 요엘의 감각 속에서 그 시간은 영원처럼 늘어졌다. 등 뒤에서 닫히는 도시의 불빛,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그리고 발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

“크윽!”

요엘은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벌려 좁은 파이프 벽면을 지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은 인간이 내려가도록 설계된 통로가 아니었다. 매끄러운 금속 내벽에는 잡을 곳이 전무했고, 곳곳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녹슨 볼트와 배관 이음새들이 톱날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까아아악!

오른쪽 어깨가 튀어나온 배관에 부딪혔다. 셔츠가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타는 듯한 고통이 뇌수를 찔렀지만, 요엘은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횡격막이 비명을 안으로 삼켰다. 그는 고통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직 살아있다. 아프니까, 살아있다.’

도시의 약물과 안정화 프로토콜이 지워버렸던 ‘고통’이라는 감각이, 역설적으로 요엘의 생존 본능을 깨웠다. 그는 척추를 둥글게 말아 충격을 분산시키며, 벽면과의 마찰을 이용해 낙하 속도를 줄이려 안간힘을 썼다. 손바닥의 가죽이 벗겨지고 손톱이 깨져 나갔지만, 그는 벽을 놓지 않았다.

철퍽.

둔탁하고 젖은 소리와 함께 낙하가 멈췄다.

무릎이 꺾이고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요엘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폐가 충격으로 일시 정지한 상태였다.

“커헉... 쿨럭...!”

요엘이 첫 숨을 토해내자,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온 것은 산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배설물이었다. 썩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 화학 약품 찌꺼기의 독한 산성, 그리고 인간의 배설물이 뒤섞인 지독한 악취.

모션랩의 멸균실에서 맡았던 라벤더 향과는 정반대의, 구역질 나지만 지독하게 ‘살아있는’ 냄새였다.

요엘은 오물 구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오른쪽 발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으으...”

그는 진흙처럼 끈적이는 바닥을 기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청각과 촉각만이 세상을 구성했다. 머리 위쪽, 아주 먼 곳에서 민 현장관의 고함과 보안 요원들의 발소리가 웅웅거리는 진동으로 전해졌다.

‘잡히면 끝이다. 여기서 죽거나, 끌려가서 폐기되거나.’

그는 손을 뻗어 잡을 것을 찾았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파이프, 누군가가 버린 플라스틱 덩어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뼈 조각들. 이곳은 도시의 무덤이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요엘의 손목을 낚아챘다.

“?!”

요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저항하려 했다. 도시의 하수구에 사는 돌연변이 짐승인가? 아니면 내부안정국이 풀어놓은 추적 로봇인가?

하지만 그 손아귀는 기계의 차가움도, 짐승의 발톱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었다. 거칠고 투박하게 굳은살이 박혀 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심지가 박혀 있는 손.

“쉿.”

바람 소리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소리를 죽이게. 자네의 거친 숨소리가 파이프를 타고 위쪽까지 울리고 있어.”

요엘은 눈을 크게 떴다. 어둠에 적응된 동공이 희미한 윤곽을 잡아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47구역 지하의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그 그림자 같은 존재감.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노인은 그때보다 훨씬 더 늙고, 동시에 훨씬 더 강해 보였다.

“누구... 십니까?”

요엘이 턱을 떨며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요엘의 꺾인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으악!”

“힘을 빼게. 도시의 긴장을 버려. 뼈는 부러진 게 아니라, 자리를 잠시 비운 것뿐일세.”

노인의 손이 기묘한 궤적으로 움직였다. 뚝.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요엘의 발목에서 뜨거운 열기가 돌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정복술(整復術)이었다. 고통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마비되었던 발가락 끝에 감각이 돌아왔다.

“일어서게.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내려오고 있어.”

노인이 요엘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요엘은 비틀거리며 노인에게 체중을 실었다. 놀랍게도, 노인의 몸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깡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위쪽에서 윙-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추적 드론입니다.” 요엘이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열 감지 센서가 있어서 숨어도 소용없습니다.”

“도시는 열을 보지만, 우리는 흐름을 보지.”

노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요엘을 이끌고 수직에 가까운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사다리도, 발판도 없었다. 오직 낡은 배관들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잘 보게. 그리고 자네 몸 안에 있는 그 점을 믿게.”

노인이 벽을 타기 시작했다.

그것은 ‘등반’이라기보다는 ‘유영’에 가까웠다. 노인은 팔 힘으로 몸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골반을 비틀어 무게 중심을 벽 쪽으로 밀착시킨 뒤, 척추의 탄력을 이용해 위로 튕겨 나갔다.

손은 거들 뿐, 노인의 몸을 밀어 올리는 것은 뼈의 구조와 중력의 반동이었다. 배관을 딛는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마치 벽에 붙은 도마뱀처럼, 혹은 중력을 무시하는 유령처럼 노인은 순식간에 3미터 위쪽의 좁은 파이프 구멍으로 사라졌다.

요엘은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모션랩에서 수없이 분석했던 ‘인체 역학’ 데이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근육량, 레버리지, 에너지 효율... 그 모든 공식을 비웃는 듯한 원초적인 움직임.

“뭐 하고 있나! 올라오게!”

파이프 위쪽에서 노인의 손이 쑥 내려왔다. 요엘은 그 손을 잡았다.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자네는 이미 화장실에서 증명했네. 횡격막을 내리고, 뼈를 열었지 않나. 그 감각을 다리로 옮기게. 땅을 밀지 말고, 땅이 자네를 들어 올리게 허락해.”

땅이 나를 들어 올리게 허락하라.

요엘은 눈을 감았다. 발바닥에 닿는 축축하고 미끄러운 배관의 감촉. 그는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는 대신, 고관절을 열고 꼬리뼈를 말아 넣었다. 명치 끝의 점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간다.’

요엘은 몸을 던졌다.


물의 세례

노인이 이끄는 길은 미로였다. 도면에는 없는, 도시 건설 초기에 버려진 임시 배수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노인은 지도를 보지 않았다. 그는 공기의 흐름과 냄새, 그리고 벽면의 습도를 통해 길을 찾았다.

“왼쪽일세. 바람에서 쇳내가 나. 저쪽은 막혔어.”

“오른쪽. 물소리가 깊어. 이쪽이 본류야.”

요엘은 노인의 뒤를 따르며, 자신의 몸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기만 했던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기묘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어깨가 벽에 부딪히면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충격을 회전력으로 바꿔 앞으로 나아갔다. 발이 미끄러지면 억지로 중심을 잡는 대신,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몸을 낮춰 가속도를 얻었다.

도시에서는 ‘오류’로 판정될 움직임들이, 이곳 야생의 환경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한참을 달렸을까. 좁은 통로가 끝나고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도시의 지하 깊은 곳, 모든 오폐수가 모여들어 흐르는 주 수로였다. 검은 물이 굉음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지하의 강이었다.

“여기까지군.”

노인이 멈춰 섰다.

요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좁은 통로 입구에서 서치라이트 불빛이 번쩍였다. 민과 요원들이 끈질기게 추격해오고 있었다.

“놈들이... 거의 다 왔습니다.”

“아니, 놈들은 여기까지 못 오네.” 노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놈들의 장비는 이 물에 닿는 순간 고철이 될 테니까.”

노인은 흐르는 검은 물을 가리켰다.

“이 물은 도시의 모든 독을 품고 있지. 하지만 동시에, 도시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혈관이기도 해.”

“헤엄쳐서... 건너야 합니까?”

“건너는 게 아닐세. 흐르는 걸세. 물과 싸우면 죽고, 물이 되면 사네.”

그때, 통로 입구에서 민의 목소리가 증폭되어 울려 퍼졌다.

“요엘! 거기 멈춰! 그 물에 들어가면 넌 생화학 오염으로 1분 안에 쇼크사할 거다! 돌아와! 해독제를 주겠다!”

민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요엘의 목숨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통제 구역 내에서 ‘데이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는 관리자의 강박이었다.

요엘은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이미 옷을 여미고 있었다.

“선택하게, 젊은이. 멸균된 감옥으로 돌아가서 약물에 절여진 채 살 것인가, 아니면 저 더러운 물속에서 진짜 숨을 찾을 것인가.”

요엘은 민이 있는 쪽을 한 번, 그리고 검은 물을 한 번 보았다.

돌아간다면, 그는 다시 안정을 얻을 것이다. 깨끗한 침대, 맛없는 영양식, 그리고 네메시스의 친절한 통제. 하지만 그의 폐 안쪽, 그 뜨거운 점은 이미 그곳을 ‘집’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가겠습니다.”

요엘이 말했다.

“좋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게. 아주 오랫동안 참아야 할 걸세.”

노인은 망설임 없이 검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물보라조차 크게 일지 않았다. 마치 물이 노인을 삼킨 것이 아니라, 노인이 물의 일부로 스며든 것 같았다.

요엘은 횡격막을 최대한 아래로 내리고, 폐 가득 공기를 채웠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던졌다.


별들의 증인

차가움. 그리고 끈적거림.

물속에 들어온 순간, 요엘은 민의 경고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독한 화학 약품 냄새가 코와 입으로 밀려 들어왔고, 피부가 따끔거렸다. 도시가 배설한 모든 독소가 요엘의 몸을 녹이려 들었다.

요엘은 허우적거렸다. 수영을 배운 적은 있지만, 그것은 잔잔한 풀장에서 정해진 영법으로 하는 스포츠였다. 이런 격류 속에서의 생존 수영은 데이터베이스에 없었다.

물살이 요엘을 바닥으로 처박았다가 다시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숨이 막혀왔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살고 싶다는 본능이 사지를 제멋대로 휘젓게 만들었다.

그때, 앞서가던 노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노인은 헤엄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춤추고 있었다.

척추를 파동처럼 움직이며 물살을 타고 있었다. 물이 그를 밀어내려 하면 몸을 비틀어 그 힘을 추진력으로 바꿨고, 소용돌이가 치면 그 회전력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의 몸 주변에는 난류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물고기 그 자체였다.

‘물과 싸우지 마라... 물이 되어라...’

요엘은 허우적거리던 팔다리의 힘을 뺐다. 몸이 가라앉는 공포가 밀려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대신 명치 끝의 점, 신체의 중심(Core)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는 노인처럼 척추를 움직여보려 했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뻣뻣하게 굳어 물살에 저항하던 몸이 조금씩 부드러워지자, 신기하게도 물이 요엘을 돕기 시작했다. 거센 물살이 그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요엘은 눈을 감고 어둠 속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폐의 산소가 바닥나 머리가 몽롱해질 때쯤, 물의 온도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갑고 독한 기운이 옅어지고, 미지근하고 비릿한 생명의 기운이 섞여 들었다.

빛.

희미한 빛이 머리 위에서 어른거렸다.

요엘은 마지막 힘을 짜내 위로 솟구쳤다.

푸하악-!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며 요엘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폐에 들어온 공기는 달랐다. 도시의 정제된 공기가 아니었다. 습하고, 비릿하고, 흙냄새와 풀 냄새가 뒤섞인, 그리고 무엇보다 매캐한 나무 타는 냄새가 섞인 공기.

요엘은 눈을 떴다. 그리고 굳어버렸다.

머리 위에는 돔이 없었다. 회색의 공조막도, 인공 조명도 없었다.

오직 광활한 어둠과, 그 어둠을 찢어발길 듯이 촘촘하게 박힌 수만 개의 별들이 있었다. 은하수가 거대한 강물처럼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달빛이 강물 위에 부서져 내렸다.

“아...”

요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모니터 화면으로만 보았던 우주가, 날것 그대로 그의 눈앞에 쏟아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해방감과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거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어서 나오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먼저 뭍에 올라와 있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젖은 옷을 털어내며 태연하게 서 있었다. 방금 죽음의 수로를 건너온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호흡이 차분했다.

요엘은 비틀거리며 강기슭으로 기어 올라갔다. 자갈밭이 손바닥과 무릎을 찔렀지만, 그 통증조차 반가웠다.



영혼의 무게

강기슭은 조용하지 않았다.

요엘이 고개를 들자, 강 건너편 둔덕 위로 일렁이는 붉은 빛들이 보였다. 횃불이었다.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로 그림자 같은 인영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시민들과 달랐다. 매끄러운 합성 섬유 유니폼 대신, 거친 짐승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투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와 무릎에는 두꺼운 가죽 패드가 덧대어져 있었고, 팔뚝은 쇠줄처럼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죽 끈으로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으며, 소매가 없는 가죽 조끼를 입어 탄탄한 어깨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횃불의 붉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날카로운 턱선,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요엘을 꿰뚫어 보는 듯한 형형한 눈빛.

도시의 여자들에게서 보이던 그 특유의 권태와 순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횃불의 열기와 대지의 거친 생명력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여인은 요엘에게 다가왔다. 요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살아... 있습니까?”

요엘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요엘의 오른팔을 낚아챘다.

“윽!”

그녀의 손아귀 힘은 엄청났다. 단순한 악력이 아니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요엘의 손목 안쪽, 요골 동맥이 뛰는 지점을 정확하고 강하게 압박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요엘의 맥박을 느꼈다. 5초, 10초. 그녀의 손끝을 통해 요엘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뛰고 있군.”

여인이 눈을 뜨며 요엘의 팔을 놓아주었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손바닥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맥박은 거짓말을 못 해. 이게 우리의 인사야.”

여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 그녀는 요엘을 도와 일으키는 대신, 턱짓으로 요엘의 발치를 가리켰다.

“도시의 숨을 버리고 온 걸 환영해, 유령.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야. 입국 심사가 남았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검은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강물에 닳고 닳아 둥글게 마모되었지만, 크기는 어린아이의 몸통만 했다. 표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거칠게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돈이야.”

여인이 짧게 대답했다.

“돈... 이라고요?”

“도시에서는 숫자가 돈이지? 여기선 무게가 돈이야.”

여인은 횃불을 들어 강 너머,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목재 구조물들을 비췄다. ‘헤테르’라고 불리는 쿠르티아의 전초기지였다.

“저곳에 들어가려면, 자격을 증명해야 해. 너의 가치는 네가 들 수 있는 무게만큼이야.”

요엘은 멍하니 돌을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한 사람한테, 다짜고짜 이 무거운 돌을 들라니.

“난... 지금 쉬어야 합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아요. 걷는 것조차 힘듭니다.”

“그래서?”

여인은 차갑게 반문했다.

“힘이 없으면 쉴 자격도 없어. 네가 도시에서 어떤 지위였든, 어떤 지식을 가졌든 상관없어. 이 돌을 들지 못하면, 너는 저 강을 건너갈 수 없어. 그냥 여기서 죽는 거야.”

주변을 둘러싼 가죽옷의 사내들이 낮은 저음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훔... 훔... 훔...”

그것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복식 호흡을 통해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진동음이었다. 그 소리가 요엘의 고막을 울리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두드렸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엄숙함.

요엘은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뒤쪽 어둠 속에 서서 그저 요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와줄 기색은 없었다.

‘선택해야 한다.’

요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기묘하고 야만적인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자신은 정말로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 민이 말했던 ‘유령’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떨리는 손으로 돌의 표면을 만졌다. 차가웠다. 그리고 거칠었다. 도시의 매끄러운 플라스틱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수만 년의 세월과 중력이 응축된 둔중한 질감.

‘무게가... 진실이라고?’

요엘은 양손으로 돌의 양옆을 잡았다.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홈을 찾아 꽉 쥐었다.

“준비됐나요?”

여인의 질문에 요엘은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도 횡격막을 내렸다.

“흡!”

요엘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은 마치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젖은 옷, 지친 근육, 부들거리는 다리. 모든 조건이 최악이었다.

‘안 들려...’

포기하고 싶었다. 그냥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그때, 명치 끝의 점이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요엘은 자세를 바꿨다. 도시의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허리 힘으로 드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이 보여주었던 그 움직임. 뼈를 맞추고, 관절을 열고, 중력의 중심을 내리는 것.

그는 엉덩이를 더 낮추고, 척추를 곧게 폈다. 돌과 자신의 몸을 하나의 구조물로 연결했다. 내가 돌을 드는 것이 아니라, 땅이 나와 돌을 밀어 올리도록.

“으아아아아!”

요엘의 입에서 짐승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돌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1센티미터. 5센티미터. 10센티미터.

돌이 요엘의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다.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하지만 요엘은 놓지 않았다. 이 차가운 돌의 무게가, 손바닥을 파고드는 이 끔찍한 압박감이,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실체였기 때문이다.

“됐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엘은 그제야 힘을 풀었다.

쿵!

돌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요엘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요엘의 눈앞으로 여인의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이번에는 팔목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으켜 세워주려는 손이었다.

요엘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횃불 아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합격이야. 꽤 무거운 영혼을 가졌네.”

그녀가 요엘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요엘의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땅을 딛는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이름이 뭡니까...” 요엘이 물었다.

여인은 횃불을 돌려 강 너머 헤테르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세라. 내 이름은 세라야.”

요엘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라. 그 이름이 가슴 안쪽, 지도 위에 새로운 점으로 찍혔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머리 위로는 쏟아질 듯한 별들이, 발밑에는 거친 흙이, 그리고 몸 안에는 끊어질 듯 팽팽한 장력이 가득했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였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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