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by 감상자

죽을힘도 없는 새끼인, 죽어도 어차피 걸리지 않을 존재였다.

죽어도 다른 대체품으로 존재가 잊힐, 아무런 가치도 없는 투명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변화되는 투명 인간이다. 어쩌면 죽어도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투명 인간인 상태로 죽는다면, 흐르는 피도 투명일 테니까.


그녀의 말처럼 받아쳤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투명 인간에서 벗어나야 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한심해서는 안 됐다.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계속 생각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나는 받아칠 생각도 못하는, 맨날 당하기만 하는, 한심한 투명 인간이었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겨우 용기를 갖고 내뱉은 말을 한껏 더듬는 투명 인간이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꾸 눈에서 액체가 뚝뚝 떨어지다가, 이내 흐르기 시작했다. 목 끝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비가 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저 이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소리를 참아내도 거친 숨소리가 계속 흘렀고, 조용함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진정하자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계속된 반복과 함께 또다시 나사를 풀었다.

나사가 하나씩 제거됐다. 곧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은 통증으로 비명 치는 듯했다. 이것을 이렇게 열심히 했어야 했을까 싶다.


이게 제거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겨우 이런 것으로 무엇인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우연하게 이걸 다 푸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헛된 망상만 떠올렸다.


그런데 나사가 하나씩 사라질수록 어떤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전에 없던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 같았다. 흔하게 용기라고 부르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최소한의 목표가 생겼다. 그저 딱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향할 것이다. 가로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창문을 바라보고, 눈앞의 광경을 느끼고, 딱 한 발자국만 앞으로 갈 것이다.


결심은 탄력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해제해야 할 나사가 많이 남았다.

최대한 조용하게 하고 싶었지만, 자꾸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삐져나왔다.

숨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진정이 됐는지 더 이상 목에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에서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그 사이 또다시 내가 이런 번거로운 짓을 왜 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분명 지금 하려는 선택을 위해 꼭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계속되는 고통에 결심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기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도 작업 자체를 멈추지는 않았다.


너무나 세게 조여져 있는 나사들을 겨우 이런 작은 것으로 풀려니 손바닥이,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고통 따위 금방 사라질게 뻔하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자는 생각을 했다. 아니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조금 아플 뿐이었다. 아까까지 비명을 질러대던 통증은 이제 별게 아니었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을 뿐이다.


어쩐지 드라이버를 돌리는 소리가, 나사가 조금씩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 누군가 소형 마이크를 근처에 놓고 스피커로 광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해제해야 할 나사는 두 개만 남았다. 위아래에 박혀있는 나사만 해제하면 이 지긋지긋한 쇠창살은, 방범창은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항상 감옥 같던 이 방은, 내방이지만 내 방이 아닌 이 방은 감옥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거의 다 됐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곧 다가올 선택의 순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순간 가벼운 웃음이 입 밖으로 살짝 삐져나왔다. 그 소리도 역시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입을 막은 상태로 슬며시 뒤를 돌아 문고리를 쳐다봤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돌리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굳게 눌려있는 그 상태 그대로였다. 눈동자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봐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가볍게 몸속의 공기를 내뱉었고, 웃음이 났던 이유가 떠올랐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검색했던, 제한적인 데이터로 가까스로 찾았던 내용 때문이었다.

쇠창살 제거 하는 방법을 검색했는데, 피지 제거 방법들이 먼저 나왔다. 조마조마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방범창 제거 하는 방법을 검색했었다.


그렇게 최종적인 임무를 끝낸 나의 휴대폰이 저 뒤에 아무런 반응 없이 놓여있다는 게 너무나 우스웠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사소한 일이었는데도 이렇게 어렵게 했다는 게 또 웃겼다. 세상은 온통 이렇게 웃긴 일 투성일지 모른다 생각하니 계속 웃음이 삐져나오려 했다.


끝났다. 모든 나사를 제거했다. 천천히 전체 틀을 당겨보았다.

생각보다 세게 박혀있어서 쉽지는 않았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그것을 빼냈다.

최대한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 자유를 만끽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앞에는 또 다른 벽이 있을 뿐이었다. 가로막힌 저것이 자유인지, 하늘인지, 지금까지 숨죽이며 했던 행동이 전부 쓸모없는 짓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탈했다. 그저 한 발자국 전에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겨우 쇠창살 제거로 탈옥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는 또 다른 감옥에 갇혀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한 발자국만 나가자. 자유로워지자.


깊은숨을 내쉬었고, 차분하게 있고 싶었다. 갑자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겨우 진정되었던 온몸이 다시 벌벌 떨렸고, 역시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속으로 숫자를 세야 할 것 같다. 창틀에 한쪽 발을 올리고 숫자와 함께 힘껏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한순간일 테니까 조금만 참고 용기를 내야겠다. 하나부터 천천히 속으로 헤아리며, 열에 도달하면 힘차게 뛰기로 마음먹었다. 창틀을 밟았고, 숫자가 조금씩 열에 가까워졌다. 조금은 힘차게 앞으로 뛰려 했지만, 발 끝에 힘을 주기도 전에 바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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