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온몸으로 바람이 느껴졌고, 시원했다.
벌벌 떨며, 눈물 흘렸던 일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그 감정들과 눈물은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이제는 그저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었다.
별게 아니었다. 그저 한 발자국이었다. 그 용기가 상쾌함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한 발자국을 떼지 못해 고통스러워했고, 투명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다 끝났다.
그러나 바람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금방 끝날 것 같았지만, 계속 이어졌고, 어느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의 저항을 제대로 느끼고 있어야 할 텐데,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잠수하던 때의 느낌이 들었다. 순간 다시 공포감이 몰려왔다.
떨어지는 광경을, 눈앞에 펼쳐질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떠보기로 했다. 너무 긴장을 했던 탓인지, 공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기게 한 뒤, 조심스럽게 한쪽 눈을 떴고, 이내 놀라며 나머지 눈까지 떴다.
눈앞에 바닥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 이렇게 부딪히겠구나 싶었지만, 계속 그 거리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순간 당황에서 몸을 돌려보려고 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다리에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단지가 너무 삭막해 산책로를 가꾸고 정원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안내문을 봤었다. 그렇게 심어진 나무들의 가지에 다리가 걸려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나의 키보다 더 높이 매달려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 거리가 실감 나기 시작했고, 양팔을 뻗어 나무의 몸통을 잡고 발버둥 치며 발을 빼냈다. 팔에 힘이 조금 부족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고, 엉성한 자세로 풀숲 위로 떨어졌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덜덜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숫자를 헤아리며 바람을 느끼던 순간이 아주 아득하게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죽는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갖고 인형놀이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바닥에 허탈하게 주저앉아 가볍게 웃었다. 계속 참아왔던 웃음을 자유롭게 내뱉었다. 어차피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고,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냈다. 허탈한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어느 정도 웃고 나자 홀가분해졌다.
분명 온몸에 힘이 없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모르겠지만, 다리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듯 힘차게 일어나 똑바로 서보았다. 의문이 남았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런 충격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무에 걸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가득 찬 상태로 있었다. 가득 찬 달이 무척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아까 박차고 나가기 전에 보고 싶었던 풍경이 이런 것이었던 것 같았고, 이렇게 보니 반가웠다.
생각보다 천천히 아래로 낙하한 것 같았다. 문득 혹시 주변에 이런 광경을 본 사람이 있을지, 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증언해 줄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 둘러보았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고요함만이 느껴졌다.
단지 내의 가로등은 나를 비추고 있었고 나 외에는 아무도 비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듬성듬성 바닥을 향한 빛을 통해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남아있는 세상의 빛이 온통 내 소유인 것만 같아 묘한 기분에 취해 있을 때 발바닥을 통해 약간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집에서 그대로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맨발이었고, 초 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밤사이의 시간이 모두 빼앗아 어딘지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자리에 계속 서있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출퇴근을 위해 움직일 텐데, 이 모양으로 나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겠지만,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게 겁이 났다. 그 소리 때문에 이른 시간에 잠을 깨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언제 밖으로 나갔다 온 것이냐고 따져 물을 것 같았다. 또다시 눈, 코, 입이 없는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올림 버튼을 누르자 버튼 주변에 빛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수리가 끝난 것 같았다. 곧 앞의 문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발을 내밀었다.
14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세상과 연결시켜 주던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찰나에 14층이라는 작은 소리와 함께 세상과 다시 연결됐다. 눈앞에는 키 패드가 보였다. 소리가 크게 들릴까 두려웠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용기라는 힘을 얻었고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 아까와 같이 떨림도 두려움도 없으니 무서울 게 없다고 다짐하며 키 패드에 손가락을 내밀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바르르 떨렸다. 천천히 다가가던 손가락이 검은색 바탕의 키 패드에 닿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손가락이 닿으면 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리자, 문이 그냥 열렸다. 아무래도 키 패드가 고장이 나서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고,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어째서 열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잠금 상태로 만들어 두고, 드라이버를 돌려 방범창을 제거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던 것일까. 방안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방범창은 바닥에 있었고, 그 누구도 들어온 느낌은 없다. 창가 쪽으로 조심히 걸어갔고, 창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
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할 만큼 했으니, 다시 방범창을 달아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이것을 볼 것이고, 분명 추궁이 이어질 테니까. 그래도 나한테 큰 관심이 없으니, 내 방에 관심을 두거나 자세히 볼 일은 없으니, 대충 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제거할 때는 분명 스피커를 통해 들리던 것 같은 나사 소리는 생각보다 너무 조용했다. 이렇게 작은 소리인데 들릴까 봐 긴장했었던 나를 떠올리니 엄청난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눕고 싶었다.
원래보다 허술하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나사를 대충 돌렸다. 어설프지만 모든 작업을 끝냈고 드라이버를 손에 쥐고 원래 있던 위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아마 금방 일어나서 다시 학교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때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극도로 억눌려있던 긴장감이 풀리자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학교에 가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또다시 투명 인간이 되겠지만 이제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창틀에 발을 올리고 숫자를 셌던 나는 한발 나아갔다. 아직 키도 작은 그냥 볼품없는 모양새지만, 용기를 내면 된다. 별것 아니었잖아, 할 수 있잖아라면 되뇌었다.
분명 이 말을 속으로 반복했던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엔가 반복이 끝나버렸고,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의식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반복 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오늘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고, 혹시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 자체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애초에 한 발자국이었을 뿐이고, 목적을 달성했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었다. 만약 눈을 뜨면, 그저 조금 더 용기를 내자는 다짐뿐이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한 이 다짐이 얼마나 유효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