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by 감상자

어쩌면 나의 표정이 안 보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눈앞에 있는 엄마로 여겨지는 존재의 눈, 코, 입이 보이지 않듯 말이다. 어쩌면 당당하게 쳐다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역시 아무런 용기가 없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성적에 대해 긴 이야기들이 귓가를 때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소리 질러 넓은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았다.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여러 벽들에 수 차례 부딪히며 점차 힘을 잃어버린 후 힘겹게 도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냥 소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를 향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물론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분명 힘을 잃은 것 같았고, 방향을 못 잡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과녁을 벗어난듯한 화살은 이래저래 벽을 튕겨 힘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결국 나에게로 꽂혔다.


잘 들리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나에게로 매번 향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또다시 이어졌다.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신세한탄이 이어졌고, 그 끝은 기나긴 한숨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저 눈을 최대한 바닥으로 내려 깔고, 더 이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오늘은 예상 밖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공부에만 집중해도 성적이 나올까 말까인데 쓸모없는 영화 영상이나 쳐다보고 있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스트레스받을 때 해소하는 거겠거니 했더니 그냥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짓을 하고 있던 거네, 그래 다음부터는 그것도 못 보게 요금제 바꿀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지금껏 재빠르게 해 왔던 행동들이, 마치 히어로가 된 것 같은 행동들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그처럼 복면을 쓰려고 했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곳에 서있었다. 결국 히어로도 아니었으며, 그냥 흉내 내는 멍청이도 되지 못하는, 쉽게 정체가 들켜버리는 지나가는 행인일 뿐이었다. 아니 들켜버릴 정체 따위도 없는, 아무도 알아볼 수 조차 없는 투명 인간일 뿐이었다.


결국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모르게 했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수치스럽게 까발려졌지만, 그보다 더 이상 그것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두 손이 떨렸다. 유일하게 꿈꾸는 환상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답답했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감옥에 갇히는 것 같았다. 아니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었다. 저 쇠창살이 사라지면 편해질까 궁금했다. 저것만 없어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어떻게 저것을 제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들을 펼치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며, 똑같은 일들이 반복됐다. 분명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부도 안 하고 헛짓거리만 한다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고, 따끔하게 이야기해서 정신 차리게 하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탓하다가 결국 화살은, 핑계는 내가 됐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고,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이사 왔다. 온통 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분명하게 가리기 위해, 정확하게 탓을 하기 위해 이 방에 들어올 것이다.


내 방으로 들어와 가볍게 성적을 이야기하고, 나 때문에 고생 중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들어가도 되냐는 질문에 싫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차피 정해진 이야기였다. 나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데 왜 정신 못 차려? 계속 그렇게 성적 떨어지다가 어디 저기 이름도 모르는 지방으로 가서 대학 다니게? 그럴 거면 지금 학교 때려치우고 일이나 해. 싸움박질 좀 그만하고. 얼굴이 그게 뭐야. 됐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야기하기도 지친다는 듯, 가치가 없다는 듯,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있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빠르게 이어진 이야기들이 또다시 메아리가 됐다. 이래저래 부딪혔고, 결국 나에게로 다가왔다.


본인의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이, 금세 방 밖으로 나갔다. 나의 대답, 나의 다음 모습, 나의 표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나는 또다시 투명 인간이 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지르는 소리는 계속해서 나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지만 계속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창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쇠창살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투명해질수록 더 진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미 그런 상태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지만,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었다. 없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선택이 허락되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라는 투명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을 쉬고 싶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왠지 이 쇳덩어리들만 없어지면, 홀가분할 것 같았다. 제대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무거운 이것들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였다. 쇠창살 제거 방법을 검색했는데 이상한 것들만 나왔다. 몇 차례 방법을 바꾸면서 시도하자 이것들을 방범창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검색을 했고,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화장실에 가는척하면서 현관 쪽에 놓여있던 장비를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사용됐는지 모르지만 분명 신발장 위에 드라이버가 있었다. 마치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는지 모를 나보다는 분명하게, 투명하지 않은 그 녀석이 거기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현관 쪽을 바라봤다. 신발장 위에 작지만 분명하게 무엇인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했다. 아슬아슬했지만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다. 재빠르게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에 가서 문 뒤에 등을 기대고 꺼내봤다. 일자 형태의 드라이버였다. 분명 십자 형태가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이제 자유를 느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거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영상으로 본 것과는 조금 달랐고, 어디를 먼저 풀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나사를 돌렸다. 모양이 달라 힘들었지만, 열심히 돌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곳까지 들릴 것 같았지만, 최대한 조용히 그것들을 풀어냈다. 손바닥은 너무 아팠고, 포기하고 싶었다. 투명해지지 않는 고통이 손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투명 인간인 채로 있는 지금이 더 힘들었다.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신중하게 나사를 돌렸다.


하나하나 나사가 풀리자 학교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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