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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Nov 28. 2019

'자살'

단어 하나

날마다 하나의 글을 올리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내가 허물어버렸다.

그 날은 또 한 생명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기사를 접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라는 표제로 글을 쓰고 있지만 오늘 글은 단어 하나라는 표제를 쓴다.

오늘 쓰고자 하는 단어는 '자살'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공감능력이다.

나는 누군가를 보면 현재의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현재와 과거, 미래를 같이 본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는 행복, 기쁨이라는 감정보다  아픔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 더 깊게 다가온다.


내가 보는 인간의 삶은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삶은 한낮의 태양이라기보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켜진 호롱 볼이었다.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호롱불, 결국 기름이 다 타서 꺼지고 마는 호롱불이 인간의 삶 같았다. 삶이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끝이 정해져 있다.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 죽음. 그 죽음을 향해 우리는 오늘도 걷고 있다.


그렇게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것을 접할 때면 나는 깊이 가라앉았다. 유명인의 죽음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의 소식에도 나는 가라앉았다. 슬픔, 아픔, 공허함... 무엇이 그를 떠나게 만들었을까. 왜 이 사회는 그를 잡아주지 않았을까. 삶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헤맨다.


누군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의 아래 댓글 창을 보면 삶의 힘듦을 토로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책장을 보면 반 이상이 삶의 어려움을 위로해주거나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책이다. 삶이 쉬웠던 적은 분명 없었겠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의 삶도 결코 쉽지 않다.


자살, 혹은 극단적 선택이라 불리는 죽음이 나에게 주는 것은 두려움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공허함과 무력감을 같이 건네준다. 자살을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이 사회, 숨기기 급급하고 모른 척하기 바쁜 이 사회가 나는 너무도 무섭다. 공동체라며 허울 좋은 말만 하는 이 사회에서 자살은 그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차즘 우리는 우리가 아닌 혼자가 될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누군가의 기사 마지막에 적힌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이 글이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잘못이지만 내 잘못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삶을 걸어가는 이유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이 사회의 현재를 보며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본다. 그리고 깨달았다. 점차 기대가 사라지는 사회를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본 미래의 우리 사회는 기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더 가라앉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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