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이해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해'했다.
10살, 자전거를 잡아주기로 했던 누나가 손을 놓았고, 나는 돌담장에 이마를 부딪쳤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펑펑 쏟아지는 순간, 어쩔 줄 몰라하는 누나를 보며 나는 누나를 이해했다.
15살, 아버지가 주식으로 꽤 많은 돈을 잃어 집이 크게 휘청거렸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원망하던 그때, 눈시울을 붉히며 가족을 위해 그랬다는 그 말에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17살, 문학 수업 숙제 검사 시간. 못 풀었던 수학 문제가 떠올라 연습장에 수학 도식을 끄적이다가 선생님께 각목으로 100대를 맞았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란 선생님의 말에 나는 선생님을 이해했다.
22살, 나를 떠나가며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하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사람이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
29살, 나의 서툰 업무 처리에 상관이 크게 나를 질책했다. 인격 모독적인 언사에 속이 끓었지만, 내 또래의 동생이 있어 형 같은 마음으로 질책했다는 그의 말에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
지금도 나는 곧잘 누군가를 이해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이를, 내 기대를 저버린 이를,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나에게 떠넘긴 이를...
내가 이해한다는 말을 건넬 때마다 그들은 그 말을 면죄부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이해'라는 단어가 일어났던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들의 눈에 이미 생긴 내 상처는 보이지 않나 보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섰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상처가 되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괜찮다와 동의어가 아니다. 나는 항상 누군가를 이해했지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
나는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 반대로 기대가 없는 관계는 나에게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이와는 점차 멀어졌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의 숨겨진 상처를 들여다봐 준다면, 그리고 그 상처를 보듬어 준다면, 이해라는 단어가 괜찮다와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한 번쯤 살펴봐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