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Dec 03. 2019

'이해'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

나는 어릴 때부터 이해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해'했다.


10살, 자전거를 잡아주기로 했던 누나가 손을 놓았고, 나는 돌담장에 이마를 부딪쳤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펑펑 쏟아지는 순간, 어쩔 줄 몰라하는 누나를 보며 나는 누나를 이해했다.


15살, 아버지가 주식으로 꽤 많은 돈을 잃어 집이 크게 휘청거렸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원망하던 그때, 눈시울을 붉히며 가족을 위해 그랬다는 그 말에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17살, 문학 수업 숙제 검사 시간.  못 풀었던 수학 문제가 떠올라 연습장에 수학 도식을 끄적이다가 선생님께 각목으로 100대를 맞았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란 선생님의 말에 나는 선생님을 이해했다.


22살, 나를 떠나가며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하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사람이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


29살, 나의 서툰 업무 처리에 상관이 크게 나를 질책했다. 인격 모독적인 언사에 속이 끓었지만, 내 또래의 동생이 있어  형 같은 마음으로 질책했다는 그의 말에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


지금도 나는 곧잘 누군가를 이해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이를, 내 기대를 저버린 이를,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나에게 떠넘긴 이를...


내가 이해한다는 말을 건넬 때마다 그들은 그 말을 면죄부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이해'라는 단어가  일어났던 일을 되돌릴 수는 다.


그들의 눈에 이미 생긴 내 상처는 보이지 않나 보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섰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상처가 되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괜찮다와 동의어가 아니다. 나는 항상 누군가를 이해했지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


나는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 반대로 기대가 없는 관계는 나에게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이와는 점차 멀어졌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의 숨겨진 상처를 들여다봐 준다면, 그리고 그 상처를 보듬어 준다면, 이해라는 단어가 괜찮다와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한 번쯤 살펴봐주면 어떨까...









작가의 이전글 '20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