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시댁 나들이에 나섰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5인 규제 때문에 겨우내 꼼짝을 못 하다가 직계가족 규제가 풀리면서 조금 숨통이 트였다. 3월 말에 시동생 결혼이 있어 우리는 바쁘게 고향을 들락날락하는 중이다.
신랑과 나는 고향이 비슷하다. 고향에서 같은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을 하고 취직을 위해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신입생, 신랑은 복학생.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나는 동생이 둘, 신랑은 누나가 둘에 동생이 하나. 내 동생 하나는 결혼하여 고향에 살고 막냇동생도 취직하여 고향에 산다. 신랑 누나들도 결혼하여 고향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시동생도 타향살이하다가 고향으로 왔다. 우리 빼고 모두 고향에 산다. 아무튼 고향이 비슷하여 금요일에 내려와 시댁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친정으로 가 하룻밤 자고. 이런 루틴으로 주말을 바삐 보낸다. 지난 주말은 시동생 결혼할 사람과 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다들 같은 곳에 살고 있어 이미 안면식이 있지만 우리만 멀리 살고 있어 인사가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보는 첫인사이자 끝인사인 것이다.
내 결혼식이 아닌데도 할 일이 참 많다. 시부모님께서 연세가 있으시고 농사일을 하고 계셔서, 각종 예약과 주문은 큰누님 혹은 내 몫이었다. 내가 맡은 것은 결혼 선물로 김치냉장고 사기, 어머님 한복과 헤어 메이크업 예약, 형님들과 내 한복 예약이었다. 한복 담당이다 보니 함 포장도 함께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어언 8년. 이렇게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내 결혼은 정신이 없어 함 속에 뭐가 들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절하게 함 포장해주시는 분이 설명을 해주셨다.
'신랑 신부 이혼하지 말고 잘 살라고 오곡, 청실홍실을 사주단자를 넣어 예쁘게 포장해드릴 거예요. 여행가방이랑 예물, 의류, 화장품 있으시면 가져오세요. 넣어드릴게요. 소창천으로 여행가방을 멜 수 있게 다 해드려요. 신랑분이 오셔서 메고 가시면 됩니다.'
이제 생각났다. 신랑이 시골 친구들과 함을 메고 우리 집에 왔던 날이. 그래 그 안에 예물, 결혼반지 등등이 들어있었지. 그 가방을 싸는 것도 사업이 될 수 있는 거구나. 한복을 빌리는 것보다 함 가방을 싸주는 비용이 더 든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뭐 이런 곳에 돈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잘 살아라 잘살아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을 보러 가 잘 풀리게 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빌며 종교단체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그 이후 잘살지 말지는 결혼한 부부의 몫이지만, 어쨌든 첫 단추를 위해 부모님은 이리도 많은 노력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한복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식에 입을 한복을 보러 몇몇 선남선녀들이 한복을 고르고 있었다. 추천해주는 한복 한번 입어보고 다른 색의 치마저고리도 다시 입어보고. 봄이 오는 3월, 결혼하는 많은 새내기 커플들은 설레고 바쁜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뭐라고. 새내기 커플들은 결혼을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을까?
다음 코스는 형님들 한복 피팅. '프라이빗'하게 1대 1 예약으로만 진행하고 있는 고향 내 핫플레이스에서 한복을 빌려입기로 했다. 사실 나는 시동생 결혼식 때 한복을 입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결혼할 때는 남편도 함께 한복을 입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부모님 중 어머님만 한복을 입고, 친척분들 중에서도 왜 여자만 한복을 입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여성의 역할은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고 남성의 역할만 근대화되고 있는 것 같아 남녀차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입기가 싫었다. 물론 나는 한복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한복이 예뻐서 아이들과 한복 입고 가족사진을 찍고 싶어 큰아이 돌사진을 경복궁에서 한복 입고 찍었다. 내 동생 결혼식 때는 배가 불러있었기에 임부복을 새로 구입하느니 결혼할 때 입었던 한복 한번 더 입자 하여 한복을 입긴 했다. 그런데 시동생 결혼식에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었는데, 최근에 살도 빠져서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는데 왜 한복을 입어야 하는지 시어머님께 반박하지 못했다. 어머님께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했지만 은연중에 계속 한복을 입길 원하셨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과 같이 생활한복을 예쁘게 맞춰입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다 싶었다. 코로나이기도 하고 자식인 넷인 부모님께는 네 번째 결혼식이기도 하니 이번에는 손님을 초대하지 않고 가족끼리만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을 터. 하여 이번을 계기로 가족사진을 찍어보려 한다. 물론 남편은 정장을 입겠지만 뭐 어떤가. 나랑 내 딸들이 함께하는 한복 사진을 남길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나에게는 시동생의 결혼식보다는 우리 두 딸들과의 가족사진에 더 의미를 두고 진행했다. 내 한복을 빌리는 것도 아이들 한복을 구입하는 것도 모든 게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추후 거실에 걸릴 예쁜 가족사진을 상상하면서. 역시 생각하기 나름이던가.
어쨌든 한복 피팅으로 다시 돌아와서. 예약이 잘못되었는지 건물에는 문이 닫혀있었다. 전화를 걸어 예약 확인을 다시 하니 사장님이 예약을 깜박 하신듯하다. 오늘을 일정이 없어 문을 닫았는데 부랴부랴 오신다고 하셨다. 시간이 조금 남아 어머님을 모시고 근처 카페에 갔다. 어머님은 커피를 좋아하시지 않아 같이 카페 갈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때다 싶어 형님들과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도 따뜻하고 한복 피팅만 끝나면 오늘의 할 일도 끝나고. 뭔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조카들은 이제 중학생이라 어떤 사춘기를 겪고 있는지, 어머님이 조카를 키웠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신랑과 형님들의 어릴 적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뭐든 양보하는 둘째 형님, 할 말은 해야 한다 첫째 형님, 그다음에 태어난 우리 신랑. 첫아들이라 어머님께서 왕처럼 키우셨다는데. 그렇다. 우리 신랑은 그 집안의 왕처럼 자랐던 것이다. 함께 사셨던 시할머니는 그 시대 어머님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장손~ 장손~' 하며 키우셨고, 어머님도 우리 신랑을 왕처럼 키우다 보니 큰 형님과 많이 다투었다고 한다. 어머님, 큰 형님, 둘째 형님이 모두 동조하셨다.
'네 신랑은 우리 집 왕이었다.'
그렇구나. 우리 신랑은 집안의 왕처럼 자랐구나.
사실 우리 집에 모든 결정은 내가 내린다. 신혼 초에는 함께하는 삶을 원했기에 '이렇게 하면 어때? 저건 어때?' 하고 시시때때로 물어봤다. 신랑의 대답은 언제나 '몰라'였다. 처음에는 '몰라'였지만 나중에는 '...' 무시였다. 관심이 없는 건지 생각하기 싫은 건지 의견이 없는 건지 내가 알 도리가 있나. 어느 순간 그냥 내 맘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으로 지냈다. 신랑도 크게 반대하거나 크게 동조하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서 왕은 나는구나. 그런데 우리 신랑도 어렸을 적 그 집에서는 왕이었구나. 그런 신랑이 나를 왕처럼 살게 해 주었구나. 고맙다 신랑아. 나를 왕처럼 살게 해 줘서. 이렇게 나는 또 남편의 고마움을 발견하며 그동안의 아픔을 잊고 용서한다. 이런 게 부부의 삶인가. 미웠다가 고마웠다가. 찬물과 더운물을 왔다갔다하는 이 온도차가 우리의 삶이던가.
나중에 신랑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왕처럼 산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만 모르는 공공연한 사실인가. 아버님께 여쭈어봐야 하나. 진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