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떠나는 첫 해외여행
여행이 시작되면서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2주의 휴가를 위한 업무 정리로 인해 정신이 없었나 보다. 금요일 퇴근 후 일요일 출국이니 좀 쉬려던 중, 토요일 출국이란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짐을 쌌다. 회사에서 2주간의 공백을 위한 준비를 해 두느라 막상 내 여행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일단 쉬고 생각해고 싶었지만, 당장 내일 출국이다.
일주일 전 아이와 PGP (Plan-Go-Play) 일환으로 준비물 리스트를 만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일단 차근히 적어두었던 물품을 캐리어에 담아본다. 수영복, 스노클링 마스크, 구명조끼, 2주간 입을 여름옷, 아이들을 위한 햇반과 김자반, 선크림, 모자 등 준비물을 모은 후, 수하물에 붙일 짐과 비행기 탈 때 함께해야 할 짐을 구분하여 정리했다. 은행 어플을 통해 인터넷 환전을 신청하고 난뒤 늦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19시를 17시로 착각해서 너무 일찍 간 것 말고는 그때까지는 모든 것들이 평안하고 괜찮았다. 출국 수속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두어 시간 남아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공항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출국 수속을 한다. 공항에 일찍 와서 그런지 빠르게 내 차례를 맞이했다.
승무원 曰, "손님, 아이 영문 이름이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좀 다르네요?"
두둥.
비행기 이름과 여권 이름이 같은지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 가장 기초적인 일이지만, 그만큼 너무 하기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여행의 준비는 가장 먼저 비행기 티켓 예약으로 시작했는데, 우리에게는 두건의 비행기 예약이 있었다. 하나는 국제선(인천-시드니), 하나는 국내선(시드니-브리즈번).
국제선은 여행을 계획함에 있어 가장 먼저 시작한 예약이었다. 이때부터 삐끗했나 보다. 다른 이름은 완벽했는데, 큰 아이의 이름에 'A' 하나가 빠져있었다. 다행히도 인천 공항에서는 한국 승무원의 도움으로 비행 탑승이 가능했는데, 호주에서 돌아올 때는 현지 승무원의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니 미리 바꾸어 놓는 것이 좋다고 하여 급하게 변경 신청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호주에서 한참 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름 변경 시 항공사 수수료가 7.5만 원이고, 항공사에 연락하여 수수료를 결제하면 티켓 재발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A' 글자 하나 추가하는데 7.5만 원. ㅠㅠ 이것은 나의 실수에 대한 대가인가. ㅠ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A'를 구입하고, 티켓이 재발행될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여행사와 항공사의 소통 오류로 어마무시한 전화 핑퐁이 왔다 갔다 한 후, 한 시간여쯤 지나 모든 업무가 종료되었다. 그 한 시간이 나에게는 하루 같았다.
국내선은 괜찮았을까? 여행하기 몇 달 전 호주 국내선 비행기를 예약한 후, 나는 둘째 아이의 Last name과 Fist name이 바뀐 걸 알았다. 몇 번이나 항공사에 메일을 보냈지만 답변은 없었고, 호주에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전화까지 했지만 아무런 진척 사항이 없었다. 호주의 행정 업무 처리는 이렇게 어렵고 느린 거구나. 결국 시드니에 도착하여 국내선으로 갈아타면서 문의를 했지만, 뭐 이 정도는 상관없다며 쿨하게 보내주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두 번째 위기는 10시간의 비행 후, 브리즈번으로 가기 위해 시드니 국내선 공항에 체류할 때 나타났다.
여행을 계획할 때, 시드니보다는 브리즈번에서의 시간을 더 보내기로 결정했다. 시드니가 호주의 명소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계획한 자연친화적 여행은 시드니 보다는 브리즈번이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드니에 도착하는 날 바로 브리즈번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시드니 도착하여 브리즈번행 비행 이륙까지의 시간 간격은 6시간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 시드니 공항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동시간이 필요하다.
- 나 혼자 여행이 아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빠릿빠릿 움직일 수가 없다.
- 오랜 시간 비행기에 앉아 있다가, 땅을 딛고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배고프면 공항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 여행비를 절약하기 위해 인천-브리즈번으로 통합 예약한 것이 아닌, 국제선(인천-시드니)/국내선(시드니-브리즈번) 따로 예약했기 때문에 연착될 경우 다음 비행기를 놓칠 수 있는 경우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 화물칸 문 결함으로 이륙이 2시간 정도 늦어졌다. 집을 떠난 후, 인천공항에서 8시간, 국제선 비행기에서 10시간, 시드니 공항에서 2시간 정도 되자 아이들은 점점 시한폭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깥공기를 쐐지 못했기 때문일까, 밤에 푹 잠들지 못하고 쪽잠을 자서 피곤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점점 보채기 시작했고, 언제 집에 가냐며 5초에 한 번씩 질문하는 통에 나조차도 미쳐가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집은 호텔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우리가 여행을 위해 며칠 빌린 집이야'라고 설명을 했더니 아이들은 여행을 갈 때마다 '빌린 집', 줄여서 '집'이라고 부른다.) 브리즈번으로 이동하는 1시간 반 비행 동안, 아이들은 노트북을 이용해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다행히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짜증 내지 않아 나도 잠시 눈을 붙였다. 이제 고비는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한 후 시작되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처음에 공항 철도와 일반 철도가 다른 줄 알고 기차역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일반 철도를 찾아 돌아다녔다. 물론 이 역시 여행비를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공항 철도를 타고 시내까지 가는 비용이 1인 당 $18 정도(한화 1.8만 원)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브리즈번의 기차는 일반 철도와 공항 철도가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우린 결국 4인의 철도 비용을 지불하고 브리즈번 시내에 도착했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편안했고 빨랐다.
우리는 중앙역에 내려 구글 맵을 켰다. 호텔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약 20분. 이제 끝이 보인다. 길고 길었던 여행길의 끝에 안락한 호텔이 우리를 기다리리라. 하지만 그 20분이 나에겐 너무나 큰 위기였다. 호텔까지 가는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을 캐리어를 끌고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니 피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태양은 내리쬐고, 짐을 줄이기 위해 입은 외투는 땀을 내고, 아이들은 칭얼거리고 가방이 무겁다며 투덜거린다. 우리 부부는 각각 백팩을 메고 대형 캐리어 하나 기내형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투정에 값비싼 m&m을 두 개 사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어주고 아이들 가방과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데려온 강아지/토끼 인형까지 추가로 짊어졌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구글맵을 보며, 머릿속에는 '저 앞에 건물이 호텔인가? 언제 도착할까? (=이 고통이 언제 끝나려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빨리 오라는 나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짜증은 참을 수 없고,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ㅜㅜ
지금까지 20시간을 버텨왔지만, 20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나 시간의 상대성 이론인 것이냐.
대부분의 고생은 여행 초반에 훑고 지나갔다. 피곤이 쌓여서일 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로움에 젖어 마음 역시 여유로워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시시콜콜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