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내게 알려 준 생활 지침서 05
필요할 때만 오는 거야? 그렇게라도 와.
내가 고양이를 불렀을 때, 이 녀석은 한 번도 내게 오지 않았다. 왜냐면 고양이의 표정은 "나는 개가 아니거든" 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개냥이"라던가 놀아달라고 재택근무할 때 노트북 위로 올라가는 고양이를 보면 난 신기했다.
내가 학교 갔다 돌아오면 햇빛 드는 방바닥에서 자고 있다가 눈 뜨고 기지개 켜는 게 전부였다. 나한테 와서 친근감을 보인 적이 없다.
그때는 골목길에 리어카로 큰 통에다가 번데기를 담아서 파는 아저씨가 지나가곤 했다. 번데기를 사서 고양이를 꼬셔봐도 오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게 올 때는 딱 두 가지이다. 내가 멸치를 들고 있을 때 그리고 지 졸릴 때이다.
내가 오라고 해도 고양이는 꽃밭에 가서 응가를 누거나 나비를 쫓아가거나 지나가는 참새를 한참 동안 사냥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잠잘 때 옆에 있어서 좋았다.
아랫집 방한칸 집에는 엄마와 형, 여동생이 살았다. TV가 없던 그 집은 가끔 우리 집 마루로 와서 레슬링이나 주요 쇼를 보고 가고는 했다. 익숙한 고양이는 도망은 안 가고 그저 마루에 앉아서 지 얼굴 가꾸기 바빴다. 신경도 안 썼다. 물론 이 풍경은 서울의 70년대 말, 80년 초반 분위기였다.
TV에 재미난 것을 함께 보는 공간에 있었다. 함께 보는 우리 식구도, 아랫집 형과 여동생도, 고양이도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 있었다. 독립적이지만 한 공간에 있었다. 그리고 각 자가 TV를 보며 웃었다.
섭섭함은 자신이 저울로 비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만큼 줬는 데 너는 왜 그만큼 주지 않은 거니? 이럴 때 섭섭함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선물을 줄 때, 받는 사람은 선물 가치의 약 70% 정도가 최고치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즉 10만 원 가격이라 해도 7만 원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최대치이다. 각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주더라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섭섭함이 없다. 마음의 응어리도 없고 억울함도 없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아버지는 손자가 생겼다.
아버지는 손자들 오면 꼭 용돈을 주신다. 매주 오면 매주 주신다. 주실 때 말씀하신다.
할아버지 보러 안 와도 된다. 용돈 받으러 온다고 생각해도 좋다.
아버지는 평생 경리업무를 했기 때문에 돈을 함부로 쓰시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돈의 가치를 안다. 손자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살갑게 하고, 옛날처럼 "할아버지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까지 이런 시추에이션을 기대하고 섭섭해하지 않는 다. 아버지는 손자들이 한 공간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셨다.
아버지는 섭섭함과 억울함, 야속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고양이에게 배운 것일 까?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면 받은 대로 각 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내 집에 산다. 우리 집에서 밥도 먹여주고 푹신하고 따뜻한 이불을 제공한다. 고양이는 노는 줄 아나... 쥐도 잡고 바퀴벌레도 가끔 잡는 다. 나방도 잡는 다. 그래서 큰 벌레들이 마루로 돌아다니지는 않는 다. 써보니까 고양이도 바쁘구나.
나는 운명에게도 섭섭해했다. 내가 이만큼 배우고 이만큼 노력하고 이만큼 성질 참고 살았는 데 왜 이 모양일까. 억울하고 후회됐다. 그건 내가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면 섭섭함과 후회는 없었을 텐데, 고양이가 알려 준 지침을 또 깜빡했네.
오늘도 후회하네. 아니 반성인가?
뭐야?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