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약속

사랑이 깊어지던 순간

by 이건희


남쪽 바다를 여행하게 된 첫날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먹은 음식은 우리 입에 맞지 않았고, 내리쬐는 볕은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해변의 모래 역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신이 나서 나를 앞지르고 백사장을 달려 나갔다.


그곳에서 너는 바싹 익어버린 것 같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사라지고 몹시 피곤해했다. 숙소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표정에서 불편함이 드러났다. 다른 일행들과의 술자리에서 내 귀에다 대고 너무 춥다는 말을 속삭였을 때, 너의 몸은 오히려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아쉽지만 그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너는 펄펄 끓는 몸으로 오한을 호소하고 있었다. 더운 숨을 내뱉고 허공으로 손을 젓기도 했다. 이토록 뜨거워진 사람의 몸을 겪어본 적 없는 나는 그저 무섭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술을 마신 터라 네게 섣불리 약을 먹여서도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에 있는 수건을 차가운 물에 적셔 왔다. 이렇게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너의 불덩이 같은 몸을 찬 수건으로 계속해서 닦았다. 수건이 미지근해지면 다시 새 수건을 적셔서 가져왔다. 그러는 동안 너는 춥고 덥고, 앓고 잠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혹시라도 네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어지러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해열제 두 알을 먹였다.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구급차를 불러야지. 긴장하고 너를 관찰했다. 다행히 너는 곧 안정을 찾았다. 땀을 흘리기에 에어컨을 약하게 틀었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서, 마침내 너를 괴롭히던 열이 물러갔다. 얼굴은 아직까지 창백했지만 몸은 제법 식었다. 나는 진작부터 약을 먹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윽고 휴, 하고 안도하며 돌아보게 되는 것은 무력한 나 자신이었다. 너의 곁에서 나는 지지리도 무력했다.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너의 몸을 닦았고, 밤이 새도록 걱정만 늘어놓았다. 그런 것 말고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네가 아파하고 있을 때보다 낫고 나서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울행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서 너는 내 어깨에 기대어 새벽 동안 못 다 잔 잠을 자고 있었다. 밤에도 낮에도 나 하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너였다. 차 안의 더운 공기 때문에 등줄기를 타고 줄줄 땀이 흘렀다. 그와 함께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에게 더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야지. 쉬이 시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식물을 대하듯 너를 세심하게 돌보아야지. 혼자만의 약속과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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