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선이 명확해야 편안해지는 것.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자주 듣다보면 일정한 패턴, 방향, 철학이 보인다. 실제로 즉문즉설 덕후인 한분이 실제로 그랬다며 사연을 보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법륜스님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라고 예측을 한단다. 그리고 대부분 맞는다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따로 있다. 좋은 답을 알고 있는만큼 본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는가?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식이 지혜를 방해한다.
알고 있지만 실천은 하지 않고 있다면? 알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는만큼 실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 돌아보며 그러했던, 그러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법륜 스님의 말씀 중 내가 좋아하게 된 '패턴'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다.
내 삶을 돌아보니 완결되지 않은 숙제들이 보였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에피소드가 연달아 떠올랐다.
학창시절에 정말 좋아하게 된 반 친구 여학생이 있었다. 내 눈에 예뻐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공부도 잘하고, 자기 의견도 똑 부러지게 잘 말하는,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내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학급 임원도 하고 여러가지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의 나는 거의 반대에 가까운 학생이었다. 공부는 중간쯤, 무엇보다도 내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편이었다. (사실 지금의 변화된 내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좋아하지만 레벨(?)이 다르기 때문에 고백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그 사람의 얼굴을 봐야하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아주 많이 괴로운 일이다. 그러기를 몇 달.. 나는 그 친구의 책상 아래에 잘 포장한 사탕과 쪽지를 넣어 두었다. 당시의 내 성격으로는 엄청나게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냥 일상에서 대화할 때 나를 조금 더 바라봐주는 정도랄까. (그 마저도 느낌)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포기도 빨랐다. 그냥 좋은 반 친구로 점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역시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게 되니 오히려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수락해 주지 않을까 두려워서, 고백하는 자체가 창피해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면 아마 더 많이 후회했을거라 생각한다. (나름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시험. 한번의 큰 실패, 그리고 이후의 성공들. 나는 고3 때 몸이 아주 많이 안좋았다. 가장 큰 이유는 잠이었다. 아주 오랜 경험으로 보면 (어쨌거나) 내 몸은 8시간 이상의 수면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고3 때는 5시간 이상을 자면 공부를 안하는 사람인 듯 취급했다. 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무서운 뭔가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꿈 속에서 꿈을 꾸고, 깼는데 여전히 꿈속인.. 그런 꿈이었다. 인강을 듣고 있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침이고, 진짜로 깨어보니 새벽이고.. 그러다가 가끔은 저녁에 잠깐 눈을 붙였는데 눈 떠보니 아침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입 시험을 처절하게 망쳤다. 설상가상. 나는 수학을 유독 못했는데, 그 해에 수학이 역대급으로 쉽게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다. 학벌 위주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의 방향을 정하는 시험. 나는 그 시험을 처절하게 망쳤다. 이후로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번역사 민간 시험에 도전했다. 민간 시험이니 어지간하면 붙여주는 것이었겠지만 어쨌거나 합격을 했고, 실제로 아르바이트도 꽤 많이 했었다. 이후로 편입에 성공했고, 또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건 사실 운이 많이 작용했다.
편입은 원래 생각이 없었고 영어만 열심히 했었는데, 영어와 면접만 보는 학교에 합격했다. 특히 나는 번역을 했기 때문에 독해가 아주 빨랐는데, 편입 시험에는 배점이 아주 높은 어려운 독해 시험이 뒤에 몰려 있었다. 원래 잘 모르는 것은 고민하지 않고 넘기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뒷부분으로 넘어가 배점 높은 문제를 모조리 풀어 냈다. 대기업에 입사할 때는 일본어, 영어, 상경계열 전공이라는 세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나는 마침 일본 어학연수를 다녀온 상경계열 학생이었다. 서류와 면접에서 하이패스로 통과했다. 여담인데, 당시 면접을 보신 팀장님은 옆팀과의 주량 대결에서 자존심이 구겨졌던 터라 주량 쎈 신입을 원하셨다. 면접에서 주량을 물어보시길래 나는 많~이 부풀려서 소주 두병 반까지 마셔봤다고 허풍을 떨었다. (실제로는 소주 반병도 안된다.) 한참 시간이 흘러 옛 팀원에게 들었는데 팀장님이 한번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토익 점수 속이는 놈보다 주량 속이는 놈이 더 나쁘다.’ 99.9% 나를 두고 하신 말일거다.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한게 맞다. 하지만 나는 면접에 최선을(?) 다했고, 운 좋게 좋은 결과를 얻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30대까지. 아주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많이 안 좋게 멀어졌다. 내 입장에서는 사소한 오해였는데, 그 친구 입장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쌓여왔던 것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열등감과 우월감을 쉴새 없이 오갔던 (그리고 그러는 중인..)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서 서서히 그 친구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나는 뭔가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보였다. 잘난 척 하는 말을 계속 했고, 악수하면서 어설프게 힘 자랑을 하고, 성적을 비교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농담이라는 핑계로 그 친구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내 딴에는 편한 친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아주 많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오히려 그 많은 시간동안 나를 참아준 친구에게 고마워해야 할 정도다. 그 친구가 절교의 메일을 보냈을 때 나는 몇 번의 사과 메일을 보냈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를 통해서도 만나서 얘기하자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확고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사과보다는 변명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인생을 생각하면 나의 사과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닐 수 있다. 내 마음이 편하자고 사과든 변명이든 하려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한다. 그리고 한국에 말한다. 과거를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미래로 가자고. 덧붙여, 사죄라면 이미 수차례 지겹도록 했다고, 또 당신네들의 경제 발전을 위해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금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과거사 문제는 쉽게 풀릴만한 이슈는 아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일본의 주장을 반복하거나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한국 내의 집단도 목소리를 점점 키워가고 있으니 말이다. 사죄를 제대로 요구하기 위해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은 국력이 강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도체 소재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할 때, 오히려 일본이 손해보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어야 제대로 방어와 복수가 된다.
(홍대선 작가의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를 읽으면 이 부분에 대해 훨씬 담담해진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 한류가 전세계로 뻗어나가는데 기여한 것이 일본 아니었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어 자리를 잡은 후에 세계로 뻗어나간 아티스트들이 많다. K-POP, 한류 드라마에 열광한 팬들은 가까운 일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반도체를 잘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품질의 재료를 가까이서 만들어준 일본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생체실험 등 반인륜적 범죄의 결과물을 포함해서 일본의 의약 산업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일본의 기술이 들어간 의약품 중에 필수적인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참배도 까짓거 다르게 봐줄 수 있다. 우리에게, 세계인에게 전범이지만 그들에게는 최대 영토를 만들어낸 위인들이 아닌가? 마치 우리에게 광개토대왕이 그러하듯.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실력과 능력을 키우고,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 식민지 시절, 군부독재 시절,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랬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각자 자신의 일이나 열심히 해라 (딴 거 신경쓰지 말고)’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한 노력, 그리고 내가 원래 할 일을 잘 해내기 위한 노력, 어렵지만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과연 상대가 바뀔까?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할까? 그 질문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그들의 숙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느새부턴가 일본 청년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한국 청년들이 일본 여행을 부담없이 간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 우리가 일본을 극복하자는 '극일'을 외쳤던 시절에 비한다면 엄청난 변화다. 이렇게 국력과 국가 브랜드를 계속 키워가야 한다. 또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계속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