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나만 재밌는 군대 얘기
너 이XX, 평발이 왜 군대왔어?
행군을 며칠 앞둔 어느날 저녁. 조교가 내 발을 보고 당황하며 거의 소리 지르듯 말했다. 바보같지만, 그 때 나는 평발이 뭔지도 몰랐다. 당연히 면제 사유라는 것도 몰랐다. 어설프게 눈이 원래보다 더 안좋은척 했을 뿐이다. (실패했다.) 행군이나 사열을 할 때 유독 힘들었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더 웃기는 반전은 25년 후. 러너스 클럽 사장님은 내가 원래 평발이 아니라 잘못된 걸음으로 평발이 되었다고 했다. 어쩌겠나.. 25년은 이미 지나갔고.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게 군대는 많은 선물같은 경험을 주었다. 일단 체력이 좋아졌다. 마침 몸짱 후임이 들어왔다. 이 녀석은 자기 전에 100개씩 팔굽혀펴기를 했다. 따라했다. 2주일 되니까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군에 입대한 나는 그저 맞기 싫어서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냈다. 매년 사단에서 웅변대회가 있어서 포대 (중대) 마다 웅변 담당이 있었다. 우리 포대 웅변 담당이 제대하면서 나를 후임으로 지목했다. 이유는? 그냥 목소리가 커서. 어쩌다보니 나는 대대, 연대 우승을 거쳐 사단에서 2등까지 하고 여러번 포상 휴가를 갔다. 숨겨졌던 재능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왼손잡이였던 내가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을 행보관이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표지판에다 글씨를 써보라고 했다. 이후로 대대 식당 메뉴판을 적다가 포대장실의 작전 상황도를 만들게 되었다. 일은 커져서 연대 파견을 가게 되었다. 이 역시 포상휴가의 이유가 되었다.
나의 보직은 곡사포의 각도를 계산해서 포대에 하달하는 FDC (Fire Direction Center) 였다. (돌대가리들이 꿀만 빤다고 '돌프디씨'라고도 불린다.) 어느날, 나는 본부포대에 갔다. 작전상황실에 영어로 된 두툼한 포병 야전 교범 (FM, Field Manual) 세 권이 한켠에 외로이 꽂혀 있는게 아닌가? 포대에 있는 한국어 교범과 거의 같은데 언어만 영어였다. 작전 장교님에게 한 권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아무말 없이 건네준다. 펼쳐보니 역시나. 한국어와 똑같은 내용, 똑같은 구성이었다. 그 날 후로 나는 근무 시간마다 두권의 교범을 나란히 펼쳐놓고 영어와 포술을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톰 행크스의 ‘터미널’이라는 영화에 똑닮은 장면이 나와 속으로 많이 웃었다.) 당시에는 상병이 되어야 공부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가끔 고참들이 보면 ‘이등병 XX가 공부하고 있냐?’라고 시비를 걸었다. ‘포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하면 대부분 그냥 넘어갔다. 뭐, 게다가 어려워 보이는 영어책이 아니던가. ㅎㅎ 몇 달 후. 나는 포술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 좀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알고보면 영어 자료가 훨씬 읽기 쉽다. 한국어는 어려운 단어로 억지로 번역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중에 신임 포대장님과 포술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자랑 맞다.)
군대는 제약이 많다. 좋게 받아들이기에는 외부변수가 많다. 오죽하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고 말하겠는가? 일본 어학 연수 때 같이 알바하는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의 뒤에만 따서 '바이또'라고 한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해줬더니 ‘헤에~ 스고~이’ 하면서 너무 멋있다고들 반응해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렇다. 한국인은 듣기 싫어하는 군대 얘기가 일본에서는 먹힌다.)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은 군대에서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냥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편하다. 군대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것에 관해 나는 ‘무능함’이 많았다. 일단 몸이 허약했고, 책만 읽었지 눈치는 없고, 성격은 고지식한 편이었다. 작업하러 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욕을 먹었다. 느리다고. 정말 최악은 축구였다. 나는 스포츠, 특히 구기 종목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군대 축구는 거의 화룡점정이었다. FDC는 곡사포의 각도를 계산하는 일인데 최대한 빨리, 하나의 오차도 없이 결과값을 산출해야 한다. 당연히 될리가 없다. 매일 같이 맞아가며 배웠다. (그 땐 그랬다.) 생각은 줄이고, 행동을 하다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꽤 하는데?’ 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군대에서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서울대 다니다 온 후임병에게 영어 코칭을 받았고, 몸짱 후임에게 운동을 배웠다. 군대는 제약이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운도 따라 주었다. 군생활을 무작정 낙관했다면 나는 군대가 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내일 더 나쁜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쪽이었다. 실제로 자대 배치 받고 몇 달이 안되어 김일성이 사망했다. (1994년 여름이다.) 전군 비상이 걸렸고, 우리는 군장을 풀지 못하고 잠을 자야했다. 그 후로도 북한의 불안정성 때문에 안 좋은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전방 부대에서만 1급 비문이 장병들에게 공유된 적도 있다. 물론 문서가 아닌 포대장(중대장)의 육성을 통해서. 그 때는 진짜로 악몽을 꾸는 이들이 많았다. 당연히 나도 그랬다. 한국인들이 남북의 휴전 상황을 이미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일상을 살아가듯, 전방에 있었던 우리도 그랬던 것 같다. 뭐, 두려워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나에게 도전이자 좌절이었던 축구와 흔한(?) 유격, 혹한기 훈련을 모두 그런 마음으로 보냈다. 다행히 국방부 시계는 그렇게 돌아갔고, 나는 감사하게도 무사히 전역할 수 있었다.
상황이 더 나빠져도 걱정에 휩싸이기 보다는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나는 군대에서 그런 태도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태도. 우리는 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나랑 잘 안맞는 사람은 더더욱) 하지만 놓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사람은 만나는 사람,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같은 사람이고 성향도 바뀌지 않았지만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포인트다. 당신은 상대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의 방식이 바뀌면 상대도 다르게 반응할 여지가 생긴다.
"You have power over your mind, not outside events. Realize this, and you will find strength."
"너는 너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의 사건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너는 강해질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