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파타고니아
Good luck.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오직 저것뿐이었다. '행운을 빌어'. 그 이상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힘겨웠던 어제를 겨우 뒤로하고, 고단함 끝에 국경을 넘는 아침이었다. 호수를 기점으로 아르헨티나와 칠레로 나뉘는 국경, 우리는 칠레를 벗어나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출항시간이 되어가자 반대편에서 우리가 서 있던 선착장으로 달려온 배는, 이제 칠레로 향할 다른 두 자전거 여행자를 싣고 왔다. 우리가 어제 지나온 길을 이 두 사람은 이제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워낙 험하기로 소문난 길이었고, 이미 그 소문을 들었을 두 사람이었기에 우리의 얘기가 꽤나 궁금했을 터였다. 나였어도 그랬겠지. 자전거를 양손으로 지탱하고 서 있는 나를 보며 그들은 물었다. “어땠어?”
쉽지 않았다. 파타고니아를 달려온 한 달도 정말 쉽지 않았는데,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려는 그 마지막 길은 자전거 여행을 통틀어 단연코 가장 힘든 길이었다. 자전거 무게 15kg, 그 위에 실은 짐을 합해 나는 총 50kg를, 남편은 70kg의 짐덩이 같은 자전거를 끌며, 들어 올리며, 당기며 20km의 트레킹길을 지나야 했다. 산속에 난 조막만 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자전거와 함께 지나고, 사람 키 높이의 진흙벽이 수시로 나와 기어오르고 자전거와 짐을 들어 올렸다. 길이 갑자기 끊기고 난데없이 나타난 무릎 깊이의 진흙 늪을 걸어야 했다.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무릎 높이까지 불어난 냇가에는 다리가 없어 맨몸으로 그냥 건넜다. 자전거를 들어 옮기고, 돌아와서 양손에 자전거 가방을 들고 옮기고, 이 과정을 몇 번씩 반복했다. 이렇게 냇가를 겨우 하나 건너면 또 하나, 건너면 또 하나... 늪과 강, 진흙, 난데없는 급 오르막이 게임의 끝판왕처럼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힘은 빠진 지 오래고, 여기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뎠다. 전화도 터지지 않고, 이 길을 넘어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넘어져 다치면 여지없이 이 공간에 갇혀버릴 것이 뻔했다. 2년간의 여행 중 처음으로 넋을 놓고 있는 남편을 보니 더더욱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힘이 다 빠져 자꾸만 이 진흙탕 구석에서 캠핑하자는 남편을 붙잡고, 몇 미터만 더 가면 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평소 같으면 수백 번도 더 울고 징징거렸을 내가, 정말 고립되어 버릴 수도 있는 현실에 부딪치자 오히려 냉정해졌다.
마지막 1km쯤을 남겨놓은 시점. 몇 번이고 페달에 다리를 찍히고, 넘어지고, 자전거에 끌려가던 남편은 정말로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듯했다. 무릎이 나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70kg짜리 짐짝을 수백 번도 더 들고 내려 팔에 힘도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가 걷기도 어려운 좁디좁은, 길이랍시고 파놓은 구덩이는 자갈과 진흙이 구르는 급격한 내리막이었다. 브레이크는 이미 닳아버려 멈춰지지도 않는 그 무거운 자전거를 오로지 팔힘만으로 지탱하며 내리막을 내려가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를 반복했다. 이 이상 내려가다간 크게 사고가 날 것 같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다 번뜩, 아까 우리를 앞질러 간 하이커 두 명이 생각났다. 분명 선착장 앞에서 캠핑을 한다고 했었다.
“Help! Help!!!!!!!!! (도와주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내가 낼 수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서 외쳤다. 1km 정도면,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외쳤지만 아무런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여기서 나마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남은 겨우 1km가 꼭 1000km 같이 느껴졌다. 이미 저녁 9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지구의 최남단, 여름의 해가 아무리 길다 해도 10시면 어두워질 텐데, 1시간 안에 과연 선착장까지 갈 수 있을까. 못 가면 우리는 이 길에서라도 쪼그리고 자야 할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순간. “Hey!!!!”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우리를 앞질러간 모니카(Monica)였다. 어렴풋이 들린 Help라는 소리에, 우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옆에 있던 장정 둘을 끌고 올라와 준 것이었다.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펑펑 났다. 웃음도 펑펑 나왔다. 아... 정말 살았다. 새벽 6시에 출발해, 겨우 20km를 걷고 달려 선착장 앞 야영장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어쩜 그렇게도 날씨운이 따라주지 않는지 텐트를 치고 겨우 몸을 뉘일 때 까지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렇게 힘든 날 따뜻한 국물은커녕, 우리에게 남은 식량이라고는 식빵이 전부였다. 겨우 찾아낸 식빵마저도 먹을 힘이 없어 못 먹겠다는 남편의 입을 억지로 벌려 케첩, 치즈와 함께 밀어 넣었다.
다음 날, 우리가 지나온 이 길과 이 시간을 그대로 경험하게 될 두 자전거 여행자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할 수 있다면 배를 타고 돌아가서 다른 교통수단을 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길을 가겠다고 크나큰 결심을 하고 온 이들일 테다. 내가 말릴 수도, 말린다고 해서 들을 사람들도 아닐게 분명했다. 뭐, 또 이렇게 힘든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어땠냐고 묻는 그들에게 힘들다거나, 지옥 같다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들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Good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