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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렐라 Oct 23. 2019

하루쯤, 편해도 괜찮아

칠레, 파타고니아(Patagonia)

김치찌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식탁에 내가 좋아하는 구운 김, 진미채 볶음, 두부조림 등이 소담스레 놓여 있다. 엄마는 나에게 김치찌개를 한 그릇 덜어주고, 나는 김치와 함께 국물을 한 숟가락 뜬다. 언제나처럼 거실의 TV는 깔깔거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를 내보내고, 내 발치에서 얼음이(고양이)가 쓰다듬어 달라며 제 머리를 내 다리에 비비고 있다. 포근하고, 평화로운 어느 날 점심이다. 숟가락에 떴던 김치찌개 국물을 밥 위에 흘려내린다. 발갛게 물이 든 흰쌀밥을 숟가락 가득 떠서 입을 크게 벌린다.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왼쪽으로 돌아 누워 있었다. 눈 앞으로 회색 천이 보였다. 내 머리 끝까지 침낭이 덮여있고, 나는 눈만 간신히 내민 채 끔뻑이고 있었다. 온몸이 한번 부르르 떨리고서야 꿈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텐트 안에 갇혀있었다.


칠레 파타고니아 지역의 '카레테라 아우스트랄(Carretera Austral, 칠레 최남단의 도로로 약 1200km. 아직 비포장 구간이 많아 힘들지만 아름다운 길로 유명하다.)'을 자전거로 달린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가 떴다가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이 지역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하루 종일 비포장길을 달리다 텐트 칠 곳을 찾지 못한 채로 비를 맞이해야 했다. 이미 날은 저물어 가고, 어떻게든 잘 곳을 구해야 했다. 호스텔 방도 아니고 번듯한 캠핑장도 아닌, 돌을 캐다 버려진 듯 자갈이 가득한 채석장 같은 곳에 겨우 텐트를 칠 수 있었다.


겨우 텐트 칠 장소를 구했다.


벌벌 떨며 밤을 겨우 보내고 난 아침이었다. 황홀한 꿈을 꾸다 눈을 뜨니 냉혹한 현실 속에 누워 있는 내가 있었다. 어젯밤부터 세차게 내린 비에 이미 우리 텐트는 홀딱 젖은 지 오래였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물기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적셨다. 매트도, 우리 옷도, 자전거도, 가방도... 젖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내 몸뚱이뿐이었다. 세찬 비를 이기고 자전거를 탈 자신이 없어 하루 더 이곳에서 머물며 비가 멎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된 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텐트 위쪽에서 물방울이 똑, 똑, 내 얼굴과 침낭위로 떨어졌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처럼 침낭 속에 숨어 눈만 내놓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자고 이 멀고 먼 파타고니아까지 와서, 비 오는 길바닥에 누워 덜덜 떨고 있는 걸까.


텐트 바닥에 자꾸 물이 고여 물길을 파고, 양치를 하기 위해 냄비에 빗물을 받았다.


춥고 서러운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물이었다. 이미 며칠 동안 와일드 캠핑을 했던 우리였기에, 남아있는 물은 1리터가 채 안되었다. 근처에 냇가도 없으니 물을 떠 올 수도 없었다. 갈증을 해소하는 정도로만 물을 마시면 하루는 버틸 것 같았는데, 요리를 하고 양치질을 할 물이 없었다. 남아있던 빵 몇 조각과 참치 한 캔, 소시지를 구워 하루 동안 아껴서 나눠 먹는 것으로 요리에는 물을 쓰지 않기로 하고, 양치를 하기 위해 냄비를 텐트 바깥에 두고 빗물을 받기 시작했다. 힘차게 내리던 비는, 텐트를 적시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냄비를 채우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받기 시작한 빗물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한번 헹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모이는 빗물은 더딘데, 눈가에 맺히는 서러움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어제부터 내리던 빗방울은 새벽이 되니 더더욱 굵어졌다. 하루가, 정말로 이 단 하루가, 너무나도 길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갰다.


다음 날 아침. 어떻게 어제를 견디고 밤을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텐트도, 그 안의 모든 물건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해가 뜨고, 간신히 텐트를 접어 출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시 비포장길에 올랐는데, 먹을 것이 없어 아침을 굶었더니 힘이 없었다. 아직도 내 옷은 모두 젖어있고 배는 고픈데, 갈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꼬박 이틀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마을이 없다. 물도, 음식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이틀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있어야 하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이틀만  가면 파타고니아를 완주할  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이렇게 힘들게 끝마칠 필요가 있겠느냐고,   있으면 우리 조금 쉽게 가자고.   지친 나를 지켜봐온 남편은 쉽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전거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앉아, 언제 지나갈지 모를 차를 기다렸다. 칠레의 최남단 끝자락, 지나가는 차량이라고는 도로포장 공사를 위해 간간히 지나다니는  뿐이었지만 하루에  대씩은 지나다니는  봤으니 분명 한두 시간 내에 한대쯤은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우리의 자전거를 실어준 공사차량


바닥에 앉아 지나가는 차를 기다린 지도 한 시간 여가 다 되어갈 무렵, 커다란 픽업트럭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남편도 나도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고, 너무나 다행히도 트럭 운전사는 우리를 보고 멈춰주었다. 약 150km, 자갈돌 바닥의 오르막과 내리막, 중간에 페리를 타고 강까지 건너야 했던 이 기나긴 길을 이틀이 아닌 단 6시간 만에 주파했다. 즐겁고도 지난했던 한 달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도감과, 이렇듯 쉽게 올 수 있는 길이었는데 그 고생을 했다는 허무함이 우리를 감쌌다.


칠레 카레테라 아우스트랄 길의 마지막 마을에 있는 호스텔에 들어갔다. 한 달 만에 지붕이 있는 집에 들어왔고, 한 달 만에 진짜 베개와 이불이 있는 침대에 누웠다. 부엌이 있고, 화장실이 있고, 따뜻한 샤워가 있는 숙소에 눕고 나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 같은 길을 지나오며 몇 번씩 마주쳤던 다른 자전거 여행자들과 둘러앉아 서로의 고생담을 나눴다. 오늘은 마을 슈퍼에 토마토와 양파가 들어왔는지, 냉동피자를 도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등 별 것도 아닌 것들을 묻고 놀라며 일상을 만끽했다.


같은 길을 달려온 각국의 자전거 여행자들.


단순히 따뜻한 물로 씻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빛났다. 한 달 동안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달콤함은 단 하루 만에 세상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이 길을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고단했을 이틀을 포기하고 단 6시간만으로 일상을 되찾았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완주를 했든, 안 했든 길었던 이 도로에서의 자전거 여행이 끝났다. 아름다웠지만, 그 이상으로 눈물겹게 힘들었던 카레테라 아우스트랄 이었다.


아름다운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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