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 2015.06.10
여행을 시작한 지 250일이 다 되어간다.
행복하기도 했고,
외로웠고,
감동에 벅차 숨쉬기가 어렵기도 했고,
반대로 숨쉬기가 어려워 짜증 나기도 했고,
잔잔하게 그리고 때론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웃어보기도 했고,
슬픔인지 기쁨인지 억울함인지 해방감인지 모르겠는 감정에 펑펑 울어보기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누가 일러주지 않은 길을 혼자 가고 있음에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했고,
자기 자신 챙기기도 쉽지 않은 여행에서 가식 없이 남들까지 챙겨내는 사람을 보며 열등감을,
내가 먼지처럼 보이는 광활하고 광대한 자연을 보면서 경외심을,
날씨 하나 사람 하나 순간 하나에 휘둘리는 날 보면서 무력감을 느꼈다.
퉁퉁 불고 간도 제대로 맞지 않은 라면 하나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청춘만이 인생의 전성기라 생각했는데 시간에 바랜 모습이 훨씬 멋있을 수 있다는 증거를 경험하고,
때론 부서지고 바래 지고 닳아가는 그 과정이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 여행은 경험할 수 없었던, 해보지 않았던 이 모든 감정과 경험들을 느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그 과정들을 가능한 대로 가시적인 결과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이 감정과 경험들이 여행 이후의 삶과 일상에서 괴롭고, 흔들리고, 혼란스러울 때면, 언제든 찾아 꺼내볼 시금석이 되어줄 거고, 이 선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려줄 풍향계가 되어줄 거고, 뒤돌아보며 안심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거다. 감정과 경험으로 스스로를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게, 그리고 내가 가진 경험과 감정의 한계 내에서 좀 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줄 거라 확신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여행의 많은 순간은 별 볼 일 없다. 많은 시간을 옷을 꺼냈다 접어 넣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하고 많지도 않은 짐을 메고 걷다가 보낸다. 침대에 누워 기사를 보거나 웹툰을 보면서 낄낄대기도 하고.. 그렇게 따지면 내가 진짜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의 삼분지 일, 깨어있는 시간을 따져도 절반이 채 안된다. 무작정 걷고 사진기를 들이밀고 책을 읽고 글로 끄적인다고 모든 순간이 좋을 순 없으니, 반짝반짝 빛나는 찬란한 순간은 많지 않고 그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게 보내는 찌질한 순간이 더 많다. 좋은 환경에 있다한들 결국 내가 느끼고 얻는 감정과 경험은 내 그릇의 한계 이상으로 채워질 수 없더라. 그러면서 많은 순간 실패하고 자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런 실패와 좌절을 느끼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쓰일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방향이 잡히면 확신이 서지 않더라도 다음 스텝을 내딛는 것이고 그것이 해결의 시작이라는 걸 배운다. 같은 트랙에서 달리는 사람들과 교차점에서 마주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와 보폭과 장비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좌절하는 시간이 정말 아무 쓸모없음을 배우고, 트랙 밖에서 날아오는 환호와 비난들 역시 고맙고 서운하지만 들떠서 오버페이스 하게 되거나 주늑들어 걷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다 기억나지도 않는 길들을 걸어오면서 온몸은 멍 투성이고 어깨는 실핏줄이 다 터졌다.
머리는 더벅머리가 된 지 오래고 발 뒤꿈치는 까지고 살이 트는 과정을 반복해 굳은살이 덕지덕지 생겼다.
그래도 행복하고 의미 있다.
힘들지 않다거나 힘들어도 매 순간순간이 찬란하고 행복했다는 게 아니다. 뭐 빠지게 힘들고 지치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11개월을 쭈욱 버텨보자는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고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2부보다 훨씬 길었던 1부를 무탈하게 잘 마친 것 같아 뿌듯하다. 2주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