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는 해주지 못한, 낯선 이들의 진심 어린 박수.
그 사람은 넥타이를 풀고 들어왔다. 풀었다기보다 뜯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손에 들린 종이가방 안에는 맥주 한 캔이 있었는데 여기서 마시려고 산 건 아니었다. 집에 가서 혼자 마시려고 산 것이었다. 그런데 발이 여기로 꺾였다고 했다.
카운터에 앉았다. 첫 잔을 따랐다.
"오늘 퇴사했어요."
그 한마디가 바 안의 공기를 바꿨다. 시끄럽던 것도 아니고 조용하던 것도 아닌 보통의 금요일 밤이었는데 그 문장이 떨어지자 옆에 앉아 있던 사람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축하해요?" 물음표가 붙은 축하였다. 축하해야 하는 건지 위로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축하요. 맞아요. 축하."
그가 웃었다. 웃는데 눈이 젖어 있었다. 슬픈 게 아니었다. 나는 그 표정을 여러 번 봤다. 오래 참았던 사람이 마침내 숨을 내쉴 때의 얼굴이다. 울음과 웃음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해방이라는 단어가 표정으로 번역되면 저렇게 되는 것이다.
옆자리의 여자 손님이 물었다. 얼마나 다녔어요.
7년이요.
7년이라는 숫자가 카운터 위에 놓였다. 무거웠다. 잔보다 무거웠다. 2555일 넘는 아침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 사람의 무게였다.
"회사 사람들은요? 송별회 같은 거 안 해줬어요?"
"했죠. 점심에 삼겹살 먹었어요."
삼겹살. 7년의 무게를 담은 것이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담담함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았다. 서운함이 아니었다. 서운하려면 기대가 있어야 한다.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무함이 앉는다. 허무함은 서운함보다 조용하고 서운함보다 오래간다.
동료라는 단어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가장 오래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가족보다 긴 시간을 같은 형광등 아래서 보낸다. 그런데 그 관계는 조건에 묶여 있다. 재계약처럼.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안만 유효한 연결이다. 퇴사하는 순간 계약이 해지된다. 연장은 없다. 위약금도 없다.
바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도 몰랐다. 직업도 몰랐다.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곤 오늘 이 사람이 7년을 끝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잔을 들었다. "그러면 건배해야죠." 아무런 의무도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 사람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잔을 들었다. 다른 사람도 따라 들었다. 나도 들었다.
여섯 개의 잔이 부딪쳤다. 짜장면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카운터 위에 내려앉았을 때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
고개를 숙였다. 잠깐이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이렇게 안 해줬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축하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축하는 원래 가까운 사람의 몫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가족이 해주고 친구가 해주고 동료가 해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이 해주지 않으면 축하받지 못한 것이 된다. 축하의 자격을 관계의 깊이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바에서 나는 반대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누군가의 기쁨에 잔을 든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 맥락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다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으로 완성된다.
가까운 사람의 축하에는 역사가 끼어든다. 7년을 알고 지낸 동료는 그 7년의 맥락으로 퇴사를 해석한다. 잘한 건지 못한 건지를 따진다. 판단이 섞인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순수하지 않다. 축하 안에 평가가 들어 있다.
낯선 사람의 축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당신이 기쁘니까 나도 기쁘다. 그 한 줄이 전부다. 과거를 모르니까 과거로 판단하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니까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표정이 밝으니까 내 잔을 들겠다. 그뿐이다.
나는 그것이 축하의 가장 원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날 밤 바에서는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아무도 계획하지 않은 파티였다. 케이크도 없었고 풍선도 없었고 현수막도 없었다. 그냥 잔이 몇 번 더 부딪쳤을 뿐이다. 누군가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고 그는 "아직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고 다른 누군가가 "그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모른다는 대답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도 축하의 한 형태였다.
두 시간이 지났다. 그는 들어올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종이가방 안의 소주는 열리지 않았다. 혼자 마시려던 술이 필요 없어진 밤이었다.
나가기 전에 그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7년 동안 같이 일한 사람들보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느낌이에요."
이상한 게 아니다.
7년 동안 같이 일한 사람들은 그의 퇴사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계산한다. 업무가 어떻게 분배될지.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축하 안에 계산이 들어가는 순간 축하는 변질된다. 반쪽짜리가 된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에게 그의 퇴사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내일 그들의 아침은 똑같다. 이해관계가 제로인 자리에서 나온 축하는 그래서 순도가 높다. 불순물이 없다.
축하는 타인의 행복에 내 자리를 만드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자리를 만들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야 한다. 보답도 원하지 않고 기억도 원하지 않고 관계의 지속도 원하지 않아야 한다. 순수하게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기쁨.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내일이면 잊을 수 있는 기쁨.
그 가벼움이 역설적으로 가장 무겁게 남는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바에 남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대화로 돌아갔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일이면 얼굴도 흐려질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누군가 작게 박수를 쳤다. 한 명이 치니까 두 명이 따라 쳤다. 크지 않은 박수였다. 세 번 정도 손바닥이 부딪쳤을 뿐이다.
그 소리가 철문 너머로 새어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안다. 그날 밤 그가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 박수 소리가 등 뒤에서 한참을 따라갔을 것이라는 걸. 삼겹살보다 오래. 송별회보다 오래.
카운터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축하에는 자격이 필요 없다. 면허가 필요 없다. 오래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 앞에서 잔을 드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예의다. 이름을 몰라도 된다. 사정을 몰라도 된다.
그저 이 사람이 용기를 냈다는 것. 그 하나면 잔을 들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