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 shin May 11. 2016

장교의 방

@fort york.toronto

요즘의 전쟁 영화처럼 소위 Cool하거나 블록버스터 급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6.25 전쟁 당시의 전투 에피소드를 잘 그려냈던 KBS 주말 연속극 전우. 극 중의 전투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애수 어린 그리고 어쩐지 좀 촌스럽기도 한 이 주제가만큼은 기억이 생생하다. 가사가 정말 마음을 울렸었다. 대부대를 호령하는 지휘관도 직업군인도 아닌, 그저 고향에 부모형제와 생업을 다 내려놓고 전쟁의 비극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民草 병사들을 그린 노래였다. 이 노래를 들으며 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다 보면 가슴이 막 미어진다.

구름이 간다.. 달도 흐른다
피 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빗발치는 포탄도 연기처럼 헤치며
강 건너 들을 질러 앞으로 간다.
무너진 고지 위에 태극기 꽂으며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간다.


부친은 평생을 軍에서 보내셨다. 과거의 군인가족들은 참 먹을 것도 없었고 살 곳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언제나 전방의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같은 곳에서 사글세를 사셨다. 항상 연탄가스 중독에 어질어질했고 같이 사는 집주인의 사나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부친이 대위 셨을때 부대엔 주식인 쌀이 없어 감자로만 때우신 적도 많으셨다. 마치 지금의 북한군처럼 우리 국군들도 헐벗었을 당시였다. 내 어린 시절의 부모님들은 그토록 온갖 고생을 하셨지만, 그리고 곱게만 자라오신 어머니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항상 편찮으셨지만 난 물 좋고 산 좋은 한국의 강원도 전방이 온통 다 놀이터였다. 눈깔사탕이라도 먹으려면 군 트럭을 타고 한참을 황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읍내로 나와야 가능했는데  운이 좋을 경우 맛있는 짜장면 맛을 볼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은 어린 내게 풍성한 간식거리를 언제나 제공해 줬는데 냇가에서 어항으로 잡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피라미들을 비롯하여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면 논에는 수많은 메뚜기들이 온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주전자에 가득 잡아온 메뚜기들을 소금을 좀 치고 연탄 불위에 올려놓고 익혀 먹으면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가끔 산으로 올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물속의 조그만 돌들을 들칠 때마다 가재가 있었다. 주전자 가득 잡아온 가재를 끓이면 빨갛게 변했고 통째로 씹어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소위 미니 Red Lobster 였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라 어른들이 캐오는 것처럼 거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산에 가면 칡을 캐먹을 수 있었다. 당시의 달콤하고 향긋한 미국산 쥬시 플래시 껌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달짝지근 맛이 참 좋았는데, 지금 보면 굉장한 건강식인 거다. 더군다나 이런 자연이 주는 건강한 간식을 먹기 위해서는 온갖 군데를 다 뛰어 돌아다녀야 하니 신체발달 과정에 있었던 나로선 이보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를 생각해 보 어린 내가 섭취해야 할 단백질, 칼슘, 미네랄 그리고 각종 비타민들은 온통 주변의 소박한 자연인 들판과 산, 그리고 강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 덮인 삭풍의 겨울에도 먹을 게 풍성했다. 그건 콩이었는데,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꽁꽁 얼고 바싹 말라붙은 밭에서 콩이 덩굴채 주렁주렁 달려있는 가지들을 꺾어 불을 피우면 금세 몸이 따뜻해지면서, 마른 콩 껍질이 까맣게 탔다. 그걸 까면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연두색으로 예쁘게 익어있는 뜨끈한 콩들이 나오는 것이다. 얼어 터지는 손발을 종종 거리며 그 김 나는 콩들을 까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러고 나면 입 주변은 물론 얼굴 구석구석이 검댕으로 시커멓게 변하는데 그런 모습 역시 즐거웠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보면 뭔가 맛있는 향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것은 바로 콩 가지들로 불을 피우면서 위에다 대충 막 던져 올려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감자들이었다. 화들짝 놀라 녀석들을 불타다 만 막대기로 끄집어내고선 그 까맣게 탄 두툼한 껍질을 젖히면.. 와..! 그 향기 하며 뽀송 거리는 전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었던 것이다. 직장 생활 당시 중국의 어느 남방 민족 요릿집으로 초대받아 가서 애피타이저라고 나온 전갈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곤충 튀김, 서울의 어느 룸사롱에서 고급 안주라고 나온 메뚜기 튀김, 어느 나라에 가던지 스테이크를 오더 할 때면 매번 같이 시키던 구운 감자.. 그런데 그 어릴 적 춥고 배고팠던 당시 먹었던 그때 그 맛은 도저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거다. 초등학교 4학년 말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줄곳 서울생활을 했지만 그 전엔 초등학교만 세 곳을 다니며 부친과 전방 생활을 했었는데 어머니와 간호 장교들을 제외하면 온통 남자들이었고 동생 역시 남자였던지라 남성 위주의 공동체, 특히 군이라는 특수목적 집단에서 난 유년 및 소년 시절을 보낸 게 된다.

2차 대전 당시의 분대전투 실상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린 1960년대 인기 전쟁 드라마 Combat이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미드였었다. 어렸을 적 거의 한주도 빼지 않고 흑백 TV로 시청하곤 했는데 당시 거의 찾기 힘들었던 그래픽으로 처리된 총검과 시그널 음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당시 내가 다들 아저씨라 불렀던 그 군인들이 난 참 좋았다. 신체 건강하고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며 절도가 있었던 그 '군인'이라는 존재감이 내 속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토론토에 타운이 형성되고 여왕을 주축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영국군과 왕당파 캐내디언 민병대들은 온타리오 호수를 통해 상륙하려는 미국의 양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도시 방위를 위한 요새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것이 요크 요새 (Fort York)이다.

한국의 대대급 규모가 운용될 수 있는 규모의 요새였는데 1800년 초, 즉 200여 년 전에 축조된 것이다. 1812년 과 1813년 미 육군과 해군 연합군이 요크 요새를 침공했는데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던 영국군은 대패하며 요새를 버리고 퇴각한다. 이때 화약고에 폭발 장치를 해놓아 수백여 명의 양키 군대를 살상시키게 된다. 이후 양키 군들은 부근 요크 지역을 약탈하며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는데, 1814년 재조직된 캐나다 유격대에 의해 격퇴되고 영국군과 캐나다 군은 오늘의 모습으로 요새를 재정비한다. 어쨌거나 통상적인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 요새에서 내 눈에 띄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곳 요새를 지휘했던 한 장교의 방이었다.

꽤나 멋지게 마치 톨스토이의 문학 '전쟁과 평화'에서나 나옴직한 귀족 출신 장교의 프라이드가 잔뜩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주변은 단출하기 이를 때 없다. 침대와 간단한 세면 시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제복을 놓아 둘 옷장이 전부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매우 정갈하다는 거다.

군인의 주변은 항상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 나 바로 전쟁터로 나가면 돌아올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품위, 절제, 희생, 건전함, 조국, 남성적 삶, 단도직입적임, 결코 굴하지 않음, 항상 차려있음..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날 뜨겁게 했었다. 전체주의 국가, 군사 엘리트 국가, 유교 중심, 남성 지상주의 국가의 낡은 이념적 모토들이었지만 닳고 닳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래도 날 뜨겁게 한다. '조국' 이란 말은 참 오래도 잊고 있었는데, 남의 나라에서 일하다보니 다시 떠오르기도 했었다. 중미의 나라 니카라과의 엘리트 젊은이들 10여 명을 데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너희들은 너희 조국에 도대체 뭐니?'라는 식의 훈시를 하다 보면 다시금 날 뜨겁게 만드는 단어가 되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그런 과격한 단어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내가 모나지 않고 두루두루 잘 지내야 되는 큰 조직 생활을 잘했을리 없다. 부친을 닮아 불같은 성격을 지녔었고,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아니었고 명분이 없는 일은 손대기가 정말 싫었으나 스스로에 대한 명분이 서는 일은 지칠 줄 모르고 했다. 직원들이나 고객들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난 내가 마치 무슨 선동가처럼 큰 제스처와 목소리로 강의를 해대는 날 발견하곤 했다.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좋았고 내가 말하는 내용에 압도당하는 audience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마치, 나를 따르라!라고 앞에서 소리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난 조직 생활을 한 참 하고 나서야 내가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군인 체질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Bye now.




매거진의 이전글 갤러리 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