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루키는 어쩌다 소설가가 되었을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by 동민

우리는 어쩌다가 지금 이 일을 하게 된 것일까. 각자가 업으로 하고 있는 일들 말이다. 누군가는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이 자신의 직업이 되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여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 뭣도 모르고 내린 한두 번의 결정이 다른 많은 직업군을 내 삶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어쩌다 보니 지금의 일을 하기까지 흘러들어왔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직업은 '마침내' 시작하게 된 일일 수도 있다. 원래 가던 길을 비틀고 거스른 끝에 마침내 얻어낸 오래된 바람일 수 있다. 대개 '어쩌다'보다는 '마침내' 원하던 직업을 시작하던 순간이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 기가 막힌 예외가 있다. 어쩌다 찾아온 순간이 강렬한 감각으로 남아 한 사람의 업을 바꿔 버린 이야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표지

2루타, 그리고 소설을 썼다.


1978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쿄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을 외야석 잔디 비탈에 누워 관람하고 있었다. 당시 경기를 하던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선두 타자는 데이브 힐턴이라는 무명의 선수였다. 힐턴은 상대 투수의 첫 투구를 받아쳤고, 상쾌한 소리와 함께 하얀 공을 초록빛 잔디 위로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어 냈다. 그때를 회상하는 하루키의 말이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p.45-46)


피식 웃어넘길 수도 있을 법한 이 사소한 일로 하루키의 삶에서 모든 양상이 바뀐다. 그날 밤부터 하루키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재즈 까페의 주방에 있는 식탁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완성하고 이를 문예지 <군조> 편집자에게 보낸다.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얘기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실은 '밑도 끝도 없음'이 하루키의 지극히 평범한 순간을 극적인 순간으로 만든 핵심이다. 이는 그가 소설을 쓰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를 잃은 둔하고 무거운 문장은 오히려 힘을 잃게 되고, 힘을 잃은 문장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하루키는 자유로움과 가벼움은 무언가를 추구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의 본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의 자연스러운 순간에서 하나 둘 모아 둔 맥락 없는 기억들이 맞물리기 시작할 때, 소설 속 이야기는 '즐거움'을 품게 된다.


비둘기,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다.


1년이 지났다. 하루키는 <군조>에 원고를 보낸 것조차 잊고 있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뭔가를 쓰고 싶었을 뿐' 그 이상의 기대가 없었다고 하니 일단 그를 믿어보자). 어느 봄날 일요일 아침에 그는 전화를 받았고, 편집자에게 본인의 소설이 신인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아내와 함께 산책에 나섰고,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 덤불숲에서 날개를 다친 비둘기 한 마리를 보았다. 하루키는 그 비둘기를 가만히 손안에 집어 들고 근처 파출소에 데려다주었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아침에. 그때를 회상하는 하루키의 말이다.


그때 나는 퍼뜩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나는 <군조> 신인상을 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로 소설가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심히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매우 생생하게. 그건 논리적이라기보다 거의 직관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56)


또 한 번의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다. 두 번 연달아 읽다 보니 꽤나 아름답다. 하루키는 그 날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기억하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면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린다고 한다. 하루키 소설 속 즐거운 이야기는 이제 비둘기의 따뜻함까지 더해져 '기분 좋음'을 품을 준비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소설을 쓸 때면, 다만 이 샘솟는 '즐거움'과 '기분 좋음'을 문장으로 꺼내어 놓으면 된다고 한다. 참 부러운 일이다. 그의 확신처럼 하루키는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신인상을 탔다.


그렇게 하루키는 소설가가 되었다.


'어쩌다'의 이면에는


어쩌다 야구 보고 새를 주웠더니 소설가가 되었다.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너무 쉽다. 이게 사실이라면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루키도 동의한다. 누구라도 소설을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직업으로 오랜 기간 계속 소설을 쓰는 것은 힘들 수 있어도, 소설 한 편쯤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라고. 오히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에겐 효율성도 떨어지고 느린 소설 쓰는 일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 말한다. 하루키는 스스로 소설가라면 느낄 법도 한 어떤 종류의 우월감에 대해서도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로 살아온 삼십오 년의 작가론적 문단론적 문예론적 인생론적 집대성'이라는 이 책의 홍보 문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그가 소설을 쓰는 태도와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다. 작가론, 문단론, 문예론, 인생론, 이런 것들 이 책에는 없다. 이와 비슷하게 잔뜩 힘이 들어가서 꽉 웅크러뜨린 단어들 조차 찾기 힘들다.


굳이 힘주어 얘기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을 설명한다. 힘주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아예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고베 헌책방에서 책을 쓸어 모아 읽던 학생이 있었고, 없는 시간 쪼개어 매일 밤마다 주방에서 글을 쓰던 청년이 있었고, 이른 아침 일어나 자기와 약속한 시간을 진득이 지키며 이야기를 짓고 고치는 중년의 하루키가 있었다. '어쩌다'의 이면에도 '마침내'를 준비했던 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다' 직업을 갖는 것과 '마침내' 직업을 갖게 된 것 사이의 경계는 본질적으로 희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렇게 믿는 순간
삶이 조금은 더 자유롭고 가벼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우리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어쩌다'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렇게 믿는 순간 삶이 조금은 더 자유롭고 가벼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앞으로 필연적으로 마주칠 혼돈의 시간을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루키의 단어를 빌리자면 '부드러운 카오스'의 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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