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민 Feb 21. 2018

26. 설거지의 쾌감

시작하기 까지는 힘들지만 일단 한번 시작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그렇고, 운동을 하는 것이 그렇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그렇다. 이 중에 가장 자주 하는 일은 바로 설거지다. 웬만하면 그때그때 헤치우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 괜찮아 같은 이유로) 싱크대 주변에 접시가 하나 둘 쌓여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속에서도 묵직한 무언가가 하나 둘 가라 앉는 것 같아 맘이 여간 무거워 지는 게 아니다. 다 끝내지 못한 고등어의 몸통이 들러 붙은 접시를 외면하려 주방 불을 꺼보고 괜히 식물에 물도 주고 해 보지만, 비릿함을 머금은 공기 방울이 연신 내 머리 뒤에서 터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물은 튼다. 손을 대었을 때 어 이거 좀 뜨거워서 손을 빼고 싶은데 하는 느낌이 들 때 까지 수온을 높인다. 고무 장갑은 끼지 않는다. 장갑을 끼면 접시가 뽀득뽀득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느낌으로 접시의 청결함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는 동시에, 중요한 일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를 피부로 감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일단 접시든 컵이든 하나를 씻기 시작하면 큰 것 작은 것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계속 씻는다. 누가 보면 그렇게 마구 씻으면 효율적이지 않아, 비누칠을 다해 놓고 한번에 헹궈야지 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어디까지나 식기가 깨끗해 지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을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닥치는 대로 씻는다. 


설거지에도 기승전결이 있어서 클라이막스는 식기의 80% 정도를 씻었을 때 찾아온다. 이 때가 되면 거치대에 가지런히 정렬된 그릇이 주는 산뜻함과 업의 완수를 목전에 둔 정복감이 짝을 이뤄 설거지의 쾌감이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흥분하면 후라이팬 한 켠에 눌어 붙은 고기 한 점을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있다. 최대한 차분하고 꼼꼼하게 하던 페이스 대로 설거지를 마무리 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후라이팬의 찌든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는다).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설거지를 막 끝내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주변을 닦는 때다. 설거지의 연장선으로 주방 정리를 끝내는 의식 같은 것이랄까. 이 순간이 좋은 이유는 키친 타올과 세제 때문이다. 요즘 계속 쓰고 있는 키친 타올은 헝겊에 가까운 소재로 되어 있어서 닦는 느낌이 아주 좋다. 예민한 사람이 내 앞에 앉아 나의 말 토씨 하나 까지 오롯이 흡수해 주듯, 이 키친 타올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주변의 온갖 어지러운 것들을 꼼꼼이 받아 들인다. 이 일을 제라늄 향이 나는 세제가 거든다. 사실 세정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향이 너무 좋다. 세제의 향이라고 하면 파인솔이나 409에서 나는 코끝이 저리는 냄새를 떠올렸는데, 이 제품은 깨끗한 곳에도 그냥 뿌려 놓고 싶을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잘 정돈된 주방을 대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비로소 새 요리를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책을 하나 더 사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25. 깻잎 한장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