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까지는 힘들지만 일단 한번 시작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그렇고, 운동을 하는 것이 그렇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그렇다. 이 중에 가장 자주 하는 일은 바로 설거지다. 웬만하면 그때그때 헤치우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 괜찮아 같은 이유로) 싱크대 주변에 접시가 하나 둘 쌓여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속에서도 묵직한 무언가가 하나 둘 가라 앉는 것 같아 맘이 여간 무거워 지는 게 아니다. 다 끝내지 못한 고등어의 몸통이 들러 붙은 접시를 외면하려 주방 불을 꺼보고 괜히 식물에 물도 주고 해 보지만, 비릿함을 머금은 공기 방울이 연신 내 머리 뒤에서 터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물은 튼다. 손을 대었을 때 어 이거 좀 뜨거워서 손을 빼고 싶은데 하는 느낌이 들 때 까지 수온을 높인다. 고무 장갑은 끼지 않는다. 장갑을 끼면 접시가 뽀득뽀득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느낌으로 접시의 청결함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는 동시에, 중요한 일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를 피부로 감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일단 접시든 컵이든 하나를 씻기 시작하면 큰 것 작은 것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계속 씻는다. 누가 보면 그렇게 마구 씻으면 효율적이지 않아, 비누칠을 다해 놓고 한번에 헹궈야지 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어디까지나 식기가 깨끗해 지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을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닥치는 대로 씻는다.
설거지에도 기승전결이 있어서 클라이막스는 식기의 80% 정도를 씻었을 때 찾아온다. 이 때가 되면 거치대에 가지런히 정렬된 그릇이 주는 산뜻함과 업의 완수를 목전에 둔 정복감이 짝을 이뤄 설거지의 쾌감이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흥분하면 후라이팬 한 켠에 눌어 붙은 고기 한 점을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있다. 최대한 차분하고 꼼꼼하게 하던 페이스 대로 설거지를 마무리 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후라이팬의 찌든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는다).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설거지를 막 끝내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주변을 닦는 때다. 설거지의 연장선으로 주방 정리를 끝내는 의식 같은 것이랄까. 이 순간이 좋은 이유는 키친 타올과 세제 때문이다. 요즘 계속 쓰고 있는 키친 타올은 헝겊에 가까운 소재로 되어 있어서 닦는 느낌이 아주 좋다. 예민한 사람이 내 앞에 앉아 나의 말 토씨 하나 까지 오롯이 흡수해 주듯, 이 키친 타올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주변의 온갖 어지러운 것들을 꼼꼼이 받아 들인다. 이 일을 제라늄 향이 나는 세제가 거든다. 사실 세정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향이 너무 좋다. 세제의 향이라고 하면 파인솔이나 409에서 나는 코끝이 저리는 냄새를 떠올렸는데, 이 제품은 깨끗한 곳에도 그냥 뿌려 놓고 싶을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잘 정돈된 주방을 대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비로소 새 요리를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책을 하나 더 사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