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결혼 전에 아내와 내가 사내커플로 동료들 몰래 연애를 하면서 한 직장에 다니는 상황에서 나의 이직을 고민하는 문제로 상의를 하던 중에 무심코 애인과 직장을 놓고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묻는 말이 나와서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당장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애인보다 직장이고, 직장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서 아내는 나에게 보통의 여자들은 애인을 선택하는 남자에게 더 점수를 많이 주지만 자기는 애인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남자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애인이 혼자 벌어서 평생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당장 직장을 잃고 제대로 벌이도 못한다면 어차피 애인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고 주장이었다. 데이트를 하면서 눈앞에 앉아 있는 애인 대신에 직장을 선택한 센스 없는 사람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아내였다. 감성적으로 생각해서 애인을 우선순위로 하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직장을 우선순위로 올려놓는 사람을 현실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아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버한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1994년 11월에 결혼을 했다. 우연히 같은 날 다른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 친구 녀석이 있어서 부부가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몇 군데 동반 여행을 약속했었다. 그런데 친구 녀석이 어쩌다 비행기를 놓치게 되어서 다음날에 급하게 비행기표를 구해서 여행지에 뒤늦게 도착을 했는데 미리 잡아 놓았던 호텔 예약이 전부 취소가 되는 바람에 갈 곳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당장 마땅한 호텔조차 잡을 수도 없고 어찌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친구 부부를 우리가 빌렸던 콘도에서 하루를 재워주면 어떻겠냐고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콘도에 방도 하나 더 여유가 있으니 괜찮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방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큰방을 반으로 나눠서 가운데를 불투명 유리문으로 공간만 분리해 놓은 것이라서 한쪽은 침대가 있고 다른 쪽은 그냥 이불을 깔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전부였던 것이다. 신혼여행을 와서 다른 부부를 재워준다는 신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그래도 내 친구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신혼여행 숙소를 공유한다는 생각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때 아내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통이 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이 좋은 건지? 남편 기를 세워주려고 인심을 쓴 건지? 참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든 그 친구에게 갈 곳이 없으면 우리가 묵고 있는 콘도에 와서 하룻밤 묵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연락을 했더니 친구 녀석은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겠다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우리 숙소에 나타났다. 요즘도 그 친구 부부와는 결혼기념일마다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때 당시의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다음날에는 우리도 미리 예약을 해놓았던 새로운 호텔로 숙소를 옮겼고 친구 부부도 다행히 다른 호텔을 찾아서 신혼여행을 마무리했었다.
그 후 시간이 좀 지나서 친구 부부가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며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왔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아내는 안 그래도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왜 아기가 생기지 않는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생기는대로 낳아서 잘 키우면 좋은 것이라고 했는데 아내는 불임 클리닉 같은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아기에 집착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내는 1996년 5월에 그렇게도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딸이 귀한 집안 내력 때문에 평소 아들보다 딸을 원했던 나와는 다르게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한다던 아내한테 나중에서야 이유를 듣고 알게 되었는데, 첫아이를 아들을 낳으면 하나로 자녀계획을 끝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아들 타령을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아들 선호 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큰아이를 혼자서 외롭게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며 아기를 하나 더 낳아서, 이왕이면 딸을 낳아서 남매로 키우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정말 아들에게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만 봐도 아내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어떻게 본인이 원하는 성별로 순서까지 맞춰가면서 아이들을 낳고 키워낼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결혼 후에 큰아이를 낳기 얼마 전에 형님이 운영하던 컴퓨터 대리점이 부도가 났다. 당시 중학교 교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우선 급한 불 먼저 꺼야 한다고 어머니와 함께 은행에 가서 적금을 깨고 바로 퇴직금을 담보로 신용대출까지 받아서 목돈을 만들어 전해주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부족하기만 했다.
부모님 댁에 온 가족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지만 형제들이 다들 30대 중후반에 아이들 키우기도 버거운 실정이란 것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었다. 당장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흩어졌는데,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시에 아내는 첫아이 출산을 앞둔 만삭의 상태였고 나름대로 열심히 돈을 모아 청약해 놓았던 아파트에 입주하기 얼마 전이라서 우리도 여유돈이 없는 시기였는데, 지금 바로 우리가 사는 전세를 빼서 아주버님께 우선 융통을 해드리자는 말을 꺼냈다.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아내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시댁 식구들이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우리 부부가 상의도 안된 상태로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이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세를 빼서 전세금을 우선 형님께 드리고, 친정에는 장인 장모님만 계시니까 우리 살림살이를 임시로 처가에 옮겨 놓고 그곳에서 아이도 낳고 아파트 입주 전까지 지내면 된다며 힘이 좀 들겠지만 내가 당분간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 아니겠냐고 하는 것이다. 이때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친정 일도 아니고 시댁 일로 당장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금까지 내줄 생각을 며느리인 아내가 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아내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아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짧은 순간 나는 혹시라도 형님에게 빌려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를 상상해 보면서 그때의 막막함까지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했던 시간이었다.
결국 아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전세를 빼서 형님에게 융통을 해주고 살림살이를 이삿짐 차에 가득 싣고 만삭의 아내와 함께 처가에 도착했을 때 당시의 기분은 그다지 표현하고 싶지가 않다. 옛말에 남자가 보리가 서말만 있어도 절대로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양가 부모님들께는 신세 지지 않고 살겠다고 했던 나의 다짐은 그렇게도 힘없이 무너졌다. 어찌 되었든 아내 덕분에 적지 않은 전세금으로 급한 사정을 막았고, 그런 후에 형님 사업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융통해 주었던 돈을 돌려받고 입주할 아파트 잔금은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형님이 부도난 것은 어찌 그렇게들 소식이 빠른지 여기저기서 다 알고 있었지만 아내의 미담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랬다.
다행스럽게 아파트 입주를 끝내고 한두 달이 지나고 무탈하게 지내던 중에 이번에는 누님 댁에서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왔다. 매형이 조기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골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직장 내 행사도 아니고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였던 탓에 아무런 보상이나 지원도 없이 한 달 반 이상을 수입이 없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참으로 막막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에는 조카들도 어리고 누나는 전업주부여서 수입원은 오직 매형 한 사람뿐이었다. 이때에도 아내는 다 계획이 있었다. 평소 생활비에서 조금씩 모아서 저축해 놓았던 돈 100만 원을 봉투에 담아서 누나에게 전해준 것이다. 당시에 나의 월급이 대략 100만 원 조금 넘을 정도였으니 우리에게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매형이 다쳤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에게 형님댁에 가자고 하면서 봉투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는데 그게 만 원짜리 100장의 현찰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매번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미안하게 하는 여자가 바로 아내였다. 이번에도 고마웠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캐나다에 올 때에도 아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아마 한국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평소에 신중을 기하는 유형인데 아내는 우선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캐나다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서류를 진행시키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하루라도 더 빨리 경험을 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며 결정을 서둘렀다. 평소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사촌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하시고 미국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러 몇 달 동안 머무르시면서 형제분들과 여행도 하시고 새로운 문화와 사회를 경험해 보시고 돌아오셔서는 조카들이 미국 이민후 각자의 생활도 잘하면서 사회에서의 중요한 역할들을 하는 모습에 영향을 받으신 후에 당신 손자들도 기회가 되면 해외에서 공부를 시켜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큰 동기가 되기도 했었다. 그 후 내가 학원을 운영하며 집안에 여러가지 사정도 생기고 이런저런 핑계가 생기면서 이민이나 유학을 실현하기 힘들어지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취업비자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아내는 모든 일들을 정리해가면서 캐나다에 먼저 입국을 했다. 입국 후에 아이들은 아내가 취업비자를 가지고 있어서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 일을 하던 가게에서는 영주권을 신청할 수 없는 레벨의 비자였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취업비자를 해주신 분께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한다면서 1년 가까이 그 가게에서 일을 해주었고, 그 후에 아내가 발로 뛰면서 이곳저곳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다른 한국식당으로 요리사로 취업을 해서 우리 가족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면 정말 내가 먼 타국 땅에까지 나와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주권을 스폰서 해준다는 한국 식당에서 첫날 출근하고 돌아온 저녁 늦은 시간을 아내와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리사로 일하기로 했지만 처음에는 모든 게 익숙하지 않고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이라서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하다시피 힘들게 시간을 보내고 왔다면서 허리가 정말 끊어질 것 같이 아프다며 캐나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때의 나는 기술을 가지고 이민을 온 것도 아니고 막연하게 아이들 교육만 생각하고, 외국으로 나올 수 있는 취업비자를 받은 '기회'라는 것만 생각하고 아내를 따라온 무능한 사람이었다.
정말 남편으로서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교육도 받아보고 시험도 치러보고 기술을 배우는 기술대학에서 프로그램도 해봤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게 처음 캐나다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눈물을 보인 다음날부터 아내는 다시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무슨 일이 있어도 영주권을 받을 거라면서 허리에 파스를 몇 개씩 붙이고 일하러 길을 나섰다.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허리 통증을 감추고 다시 일터로 나간 것이다.
요리사로 일을 하는 몇 년 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생을 하면서도 나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면서 가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힘들게 일을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주권을 받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