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의 Konadian Life Mar 22. 2021

지하실에서 3년 동안

두 사내아이의

헤어컷을 담당했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잘라야 할 때가 되었다. 미용실이나 이발소를 찾아본 적이 없어서 크게 관심을 둔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동네 주변을 먼저 찾아보니 집 바로 앞 큰 길가에 미용실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을 이용할 때 왼쪽으로만 다녀서 오른쪽에 있었던 미용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들어가기가 그래서 지나가는 척하며 안을 슬쩍 쳐다보니 캐네디언 미용사가 두 명이 있었고 옷차림새나 모양새가 왠지 미용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진한 화장에 피어싱까지 그리고 목에 타투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행인 인척 하며 건물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바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져서 자를 때가 돼서 갈 곳을 못 찾고 있을 때였는데도 아무리 집 앞이라도 가게 안의 분위기를 보고는 다시 가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내가 집에서 가까운 월마트와 같은 규모의 Superstore 안에 있는 미용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알려 주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미용실에 파마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짧은 머리를 자르는데 무슨 예약까지 해야 하냐고 했더니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모두 예약이 필수라며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가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했다.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직접 찾아가서 예약을 하는 것이 귀찮은 생각에 고민을 하다가 달리 방법이 없어서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정도 걸리는 슈퍼 스토아까지 바람도 쐴 겸 천천히 걸어갔다. 슈퍼에 도착해 매장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니 안경점 하나와 미용실이 별도의 장소로 구분되어 있었다. 미용실 안에 의자 3개가 있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계셔서 머리 자르는 것도 예약이 필요하냐고 어보니 당연한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오늘내일은 예약이 다 차있어서 3일 후에나 머리를 자를 수 있다는 답을 해 주었다. 미용실 안에 의자가 모두 비어서 있었는데도 예약이 꽉 찼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일단 예약을 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커트 비용이 얼마인지 확인을 하지 않아서 다시 발길을 돌려 비용을 물어보니 25달러라고 한다. 25달러!


캐나다로 이민전까지 블루클럽이라는 남성 헤어컷 전문 미용실이 한국에서 애용하던 곳이었는데 당시 비용이 5천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에는 캐나다의 1달러 환율이 한국의 원화 1000원에서 1200원 대로 들쭉날쭉할 때라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원화 1000원을 기준으로만 따졌을 때도 머리 한 번 자르는데 25000원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팁까지 10%를 얹어주면 27달러 50센트, 한화로 27500원! 정말 한국과의 헤어컷 비용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비싼 가격이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앞으로 나만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식구들이 전부 커트만 해도 한 달에 그 비용이 어림잡아 150불 넘게 나올 거라는 계산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캐나다에 입국 당시 취업이 가능한 비자가 아니라 단순히 머무르기만 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면 오직 아내가 벌어 온 많지 않았던 수입과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해결을 해야 해서 생활비로 나가는 비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렵게 이민을 결정한 것은 오로지 우리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생각하고 온 것이라 아내의 취업비자만 믿고 행동으로 옮긴 다소 무모한 결정이라는 말도 들었던 상황이었다. 막상 캐나다에 입국을 하고 보니 한국에서 찾아다녔던 이주공사나 이민 박람회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구해본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질 않았고, 오히려  중요한 내용은 전혀 새롭게 아내와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영주권을 받고 이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취업비자 하나만 믿고 이민을 결정을 했는데 이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한국 내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거주지를 옮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민 한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과 친척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반대 의견이 많았었다. 어찌 되었든 아내가 취업을 해서 처음 일했던 곳은 샌드위치 가게라서 아내가 가지고 있는 한식 조리사 자격으로는 당시에 전문기술비자의 자격 대상이 되지 않아서 단순 업무 비자를 받았던 탓으로 배우자인 나에게 취업이 가능한 오픈 퍼밋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됐다. 막상 아내에게 비자를 스폰서해준 가게 사장님도 우리의 사정을 알고 나서 아내에게 전문기술비자를 받을 수 있는 한국식당이나 전문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취업을 알아보라고 할 정도였다. 아무튼 아내 혼자서 취업을 해서 생활비를 번다고 해도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머리를 깎는 비용조차 부담스러웠는데 우리 아이들 머리를 깎는 비용까지 생각을 해보니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아들과 조카만이라도 머리를 깎는 비용을 줄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당신이 깎아주면 어떠냐는 한마디에 문득 내가 과거 군대에서 이발병 역할도 했었고 바리깡(이발기계)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것이 생각났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와서 안동 향토사단으로 1차 배치를 받고 다시 2차로 대구에 있는 파견 연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내무반 생활중 일병 때부터 상병 때까지 같은 내무반에 있는 선임들과 후임들 머리를 잘랐었다. 당시 우리 연대본부는 대구지역 향토사단 사단본부가 있는 대구시내에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사단 내에는 사병들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장소인 이발소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대본부의 인사과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나는 같은 연본의 작전과 소속 선임으로부터 머리깎는 기술을 배웠다. 그 선임도 사범대학교 출신의 전직 수학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늦깎이로 입대를 했던 상황이라서 이발이라는 것을 입대하기 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에 해당되는 사병이었다. 그 선임과 마찬가지로 이발을 배우게 된 것은 전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내무반에서 그래도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놈이라고 누군가가 추천을 해서 그냥 내가 뽑혔던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행정병들의 사단 전투력 측정에서 사격 성적과 수류탄 투척의 성적이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격 성적은 시력이 좋아서 그런건데 눈썰미로, 수류탄 투척은 25m 전방에 사각형 구멍으로 대충 던졌던 것이 운 좋게 잘 들어간 건데 것이 손재주로 이상하게 탈바꿈한 상황이 되어서 우연찮게 이발병이라는 타이틀이 요즘에 유행하는 '부캐'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평소에 사이좋게 지냈던 선임은 휴가 나갈 때 머리를 깎을 때 신경써서 잘 깎아 주었지만 평소에 못되게 굴거나 전혀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하는 선임들은 머리를 대충 깎아주거나 가위질로 다듬어 줄 때 작은 상처도 내면서 소심한 복수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군대에서 머리를 깎았던 기억이 나서 아내의 말에 나도 찬성을 하고 바로 마트에서 전동 이발기계를 구입했다. 그 후로 3년 동안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과 조카는 지하실에 차려놓은 이발소에서 나의 꾸준한 고객이 되었다. 다만 아내와 딸아이는 긴 생머리로 묶고 다니는 머리이기도 했고, 자주 자르는 머리가 아니라 몇 달에 한 번씩 타원형으로 한 뼘 정도씩 가위로 잘라주는 것으로 미용실 역할도 해주었다. 아내도 이곳에 파마 비용이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비싸다고 하며 내가 가끔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미용실 비용을 아끼기로 하고 1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생머리를 고집하며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한데 아내는 굳이 머리를 꾸미는데 돈을 들일 필요 없다며 나를 위로해주는게 안쓰럽기도 하다.


군대에서 아무리 머리를 깎는 것을 해봤다고 해도 실제 아이들의 머리를 깎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머릿결이 부드러운 아들 녀석은 이발기계로만 해결할 수 없어서 뒤쪽, 옆쪽의 아랫머리는 기계로 짧게 밀어주고, 중간정도 머리와 정수리쪽 머리 그리도  앞쪽 머리는 미용실에서 어깨너머로 본 기억을 되짚어 긴 집게로 층층이 집어가며 빗으로 일정하게 잘 빗어준 다음 왼손가락으로 잡은 집게손가락 두께만큼씩 가위질을 해주어 최대한 표시가 안 나게 깎아 주었다. 아들과는 달리 조카는 비교적 머리카락이 센 편이라서 이발 기계로 어느 정도 해결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깎는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로 잘라 주었더니 조금만 길게 잘라 달라고 하면서 너무 짧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내가 봤을 때 아들 녀석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머털도사 머리카락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조카 녀석은 병장 정도의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내 나름대로는 힘든 일을 잘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두 녀석은 그다지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작은엄마와 작은아빠가 괜찮다고 하면서 너희 머리 깎을 비용으로 차라리 피자를 한판 더 사주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꼬드기는 말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들 녀석은 외모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 반면에 조카는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이 늘 불만이었다. 머리를 잘라주고 몇 달이 지나서 실력이 처음보다 나아져 조카가 원하는 대로 윗부분 머리를 좀 더 길게 잘라 주었더니 아침에는 보통 머리로 등교를 했다가 오후에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친구들한테서 얻어서 바른 왁스로 모히칸 스타일로 가운데를 바짝 세워서 다닌 적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참 이상한데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서 넘겼다가 며칠은 오른쪽으로 바꿔서 다니다가, 하여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한테서 싫은 소리도 많이 들으면서도 조카는 나름대로 작은 아빠와의 티키타카를 즐겼는지 머리 스타일로 별의별 이상한 모양을 다해보며  사춘기를 보낸 것 같다.


그렇게 이민 첫 해부터 사내 녀석들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하실 공간은 우리 집 이발소 역할을 했었다. 그때 아꼈던 이발 비용으로 가끔씩 아이들에게 피자도 사주긴 했지만 아들과 조카 용돈으로 대신 주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 이민한지 10개월 정도 후에 아내가 한식당 요리사로 전문기술비자를 받아서 직장을 바꾸게 돼서 나도 일할 수 있는  오픈 퍼밋을 받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도 이발 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아까운 생각에 지하실 이발소 운영을 계속했었다.

그 후로 두 녀석이 중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 조카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아들은 더 이상 더벅머리를 하고 다니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우리 집 지하실 이발소에서 진짜배기 미용실로 거래처를 바꾸기로 했다. 한창 사춘기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엉성했던 머리를 보여주기 싫을 수도 있었을 텐데 3년이나 부족했던 의 이발 실력에 큰 불만 없이 잘 따라 주었던 아들과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생각이 든다.


아들이 밴쿠버로 직장을 잡아서 독립하기 전까지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요즘에 유행한다는 투 블럭으로 머리를 깎은 지 좀 지나서 귀 옆과 뒤쪽 짧은 머리를 기계로 살짝만 올려서 쳐달라고 부탁하면 10분 정도만 시간을 들여서 짧은 머리로 커트를 해주곤 했다. 그런 다음에 2주 3주를 지내고 나서 미용실로 머리를 자르러 가는 것이 일상처럼 돼서 한동안은 나에게 머리를 자연스럽게 맞기는 아들이 예전에 운영했던 가족 전용 지하실 이발소를 생각나게 했었다.

지금도 아들 녀석은 아빠가 지하실 이발소를 운영할 때 처음에는 기본이 한 시간 정도 걸린 것이 1년 정도 지난 다음부터는 30분 정도로 줄어서 그나마 의자에 앉아 있기가 나아져서 찮았다고 한다. 한 시간씩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두 명이나 머리를 잘라서 모양을 만들어 주시느라 힘이 더 많이 들었을 거라면서 이야기를 해줄 때에는 아들의 착한 마음이 내 가슴속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어 고마운 생각이 다.


내가 다시 지하실 이발소를 열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믿었던 아들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