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의 Konadian Life Mar 15. 2021

믿었던 아들이

사촌 형과 함께

다른 길로 뛰어갔다.









아이 둘(첫째인 아들과 둘째인 딸)을 데리고 막 여름꽃이 피려는 6월 첫 번째 토요일 캐나다에 입국을 했다. 이민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마치 여행을 온듯한 느낌으로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아이들 학교를 배정받기 위해서 입학등록을 하는 것이었다. 도착한 이틀 후 월요일이 되자마자 두 아이를 데리고 시내에 교육청을 방문했다. 캐나다는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여름방학이라서 하루라도 더 많이 학교생활을 경험하고 여름방학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시차 적응하는 기간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학이 시작되기 전 남은 3주만이라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적응하는 쪽을 선택했다. 3주가 지난 다음 7월과 8월 여름방학 이후에  9월부터 새로운 학년으로 올라가야 했기우리 부부는 교육청에 방문했을  두 아이 모두 언어문제가 걱정되어 입학 담당자에게  한 학년씩 낮추어서 5학년과 1학년으로 입학 등록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간단한 언어 능력 테스트를 진행하고 나서 입학 담당자는 아들은 영어로 수업을 들을 정도가 되고, 다소 언어능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딸은 아직은 어린 나이라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수업을 받으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는 을 하고는 제 나이에 맞게 6학년과 2학년으로 입학 등록을  끝내 버렸다. 생각지 않게 큰아이는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생활을 단 3주만으로 마무리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첫째인 아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서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 제 나이에 맞는 6학년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사실 아들은 한국에서는 3월에 6학년을 시작했지만 캐나다 입국 일자가 다가오면서 많은 서류 준비와 이사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5월 초에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지내면서 학교생활을 중단했기 때문에 불과 두 달 열흘 정도만 6학년 공부를 했었다. 그리고 학기 제도가 다른 캐나다에 도착해서 다녔던 초등학교에서의 짧았던 3주 동안 6학년  학습기간을 합하면 3개월 정도만에 초등학교 6학년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삶의 터전을 바꾸게 된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학교생활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그동안의 친구관계도 모두 무너진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라서 아내와 나는 어린 나이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둘째보다는 이제 사춘기에 들어선 첫째에게  많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즈음에 하는 말이 캐나다에 오자마자 초등학교를 건너뛰듯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7학년 입학 에는 나름대로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 교육청 입학담당자 덕분에 동갑내기인 학교 친구들과 생활을 하게 되어서 더 좋았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당시에 그분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해야 할 일이 된듯하다.

Edmonton catholic school boards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에 입국해서 여름방학을 보내던 중에 나의 캐나다 입국 두 해 전에 갑작스러운 형님의 사고로 혼자되신 형수님이(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동반 사고 후유증으로 형수님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혼자서 사춘기 연년생아들 둘을 돌보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조카 녀석 둘 중에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던 둘째를 형수 친척이 있는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하자 시부모인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유학을 보낼 거라면 차라리 작은 아빠가 있는 곳으로 유학을 보내서 더 안심할 수 있는 쪽으로 진행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던 것이다. 형수님은 이민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 조카를 보내는 것은 시동생과 손아랫 동서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처럼 느껴서 중국에 있는 친척을 생각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아무런 사전 경험도 없었고, 캐나다의 문화와 사회에 적응도 시작하기 전에 유학생 조카까지 케어하는 가디언의 역할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게 조카는 유학기간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로 하고 여름방학중에 급히 서류를 진행시켜서 유학 비자를 받고 8월 중순에 캐나다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조카의 나이는 첫째인 아들 녀석보다 한살이 많았지만 영어능력이나 학교에 적응하는 문제를 고려해서 교육청에 한 학년을 내려서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했더니 원하는 대로 7학년에 입학을 시켜주었다. 물론 영어 테스트를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집 두 아이도 교육청에 방문했을 때 한 학년을 내려서 입학등록을 해주는 것을 요청했어 언어능력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방학 후 제 나이에 맞는 7학년과 3학년으로 다녀야 했었다. 그래서 조카를 등록할 때에는 그냥 말이나 해보는 셈 치고 부탁한 경우였는데 나이에 맞는 8학년이 아닌 7학년에 등록을 해주는 것이었다. 다만 7학년 수업을 바로 듣기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면서 우선 ESL 클래스를 들으면서 정상 수업은 차츰 단계를 맞추어 나가는 것으로 짧게 이야기해주고 입학등록을 끝냈다. 우리 집 두 아이 경우와 다르게 앞뒤가 안 맞는  같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유학 컨설팅을 하는 사람한테서 들었던 바로는 유학생은 매년 등록금을 1만 달러 이상을 내고 다녀서 간혹 한 학년을 내려 달라고 하면 교육청에서 오히려 반가워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취업비자로 들어온 사람의 자녀는 무상교육 대상으로 웬만해선 학년을 내려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캐나다의 교육청이 나름대로 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카와 아들은 같은 학교에 같은 7학년으로 등록이 되어서 여름방학 이후에 당시 거주했던 타운하우스에서 가장 가까운  Louis St. Laurent Junior high school에서 새로운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들은 캐나다에 도착한 지 불과 삼 개월이 채 안된 시점에 7학년을 시작해야 했고, 조카는 단 2주만에 영어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캐나다에서 학교 1학년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Louis St. Laurent Junior high school

나는 아들과 조카의 첫 등교날인 9월 2일을 잊을 수가 없다. 

등교하기 전날에 버스로 통학하는 것이 좀 걱정돼서 집 앞에서 304번 버스를 타고나서 두정거장 뒤에 사우스게이트 트랜짓 센터에 내려서 바로 앞에서 두 번째 버스인 45번 버스로 갈아타고 한정거장만 가서 바로 학교 앞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내리면 된다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알려주었더니 두 녀석 모두 간단하다고 걱정 말라는 것이다. 더구나 아들은 사촌 형과 함께 가니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하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아침이 되어 첫날이니 그냥 차로 데려다주는 게 어떠냐는 아내의 말에 나도 그러자고 했지만 두 녀석은 버스로 가겠다고 백팩을 메고 도시락 가방까지 챙겨 집을 나갔다. 아내는 따로 둘째를 데리고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고, 나는 아들과 조카가 사뭇 걱정이 되기도 해서 차를 가지고 트랜짓 센터 건너편에 가서 두 녀석을 지켜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이 모여 있는 트랜짓 센터는 전철과 버스를 환승하는 장소로 버스정류장에는 양쪽으로 20개가 넘는 버스 노선별로 버스 넘버 팻말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어서 래하는 사람들도 많고 인파로 북적이는 장소라서 자칫하면 North gate 방향의 상행선과 Heritage 방향의 하행선을 헷갈려 할 수 있는 장소이다. 나는 트랜짓 센터 건너편 갓길에 비상등을 켠 채로 차를 세우고 304번 버스에서 아들과 조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304번 버스가 도착했고 아들과 조카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일단 첫 번째 버스에서 잘 내렸으니 바로 앞에서 45번 버스만 타는 것을 보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들이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잘 못 된 것을 느꼈다.

아들 녀석이 뛰기 시작하자 조카 녀석도 함께 달리기를 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두 녀석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지금 같았으면 셀폰이라도 있어서 연락을 취하고 버스를 다시 바꿔서 타라는 말을 전하기라도 했겠지만 당시에는 집에 있는 유선 전화기 한대와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직장에 다니는 아내뿐이었다. 그렇게 두 녀석이 모두 사라지고 나는 어찌할 줄 몰라서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달려간 아이들을 찾아볼 생각에 차 뒷문을 열고 올라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잠시 패닉에 빠졌다. 아이들은 다른 차를 타고 떠나 버린 것 같았고, 어떤 버스를 탔는지도 모른 채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한 생각이 었다. 그때 생각난 것은 아들과 조카가 버스를 잘못 탔더라도 도중에 돌아올거라 믿고 일단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제시간에 학교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전달하고 기다리는 방법이 그나마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해서 메인 출입구에 붙어있는 행정사무실로 들어가서 아들과 조카의 이름을 말하고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고 두 아이가 지각을 할 것 같다고 전해 주었더니 사무실 직원은 너무 걱정 말라며 첫째 시간 수업이 있는 교실을 알려주면서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안심을 시켜주며 안내를 해주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교실 앞으로 가서 기다리는데 그때의 시간은 정말 1분이 1시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교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지 30분 정도가 지나서 저 복도 끝에서 두 녀석 모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안심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자식은 늘 물가에 내놓은 마음이라지만 그 순간 아이들이 아무 탈없이 학교에 도착한 것이 정말 고맙기만 했다. 두 녀석 모두 얼굴 전체에 땀방울이 맺혀서 어쩔 줄 몰라하며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복도 끝에 살짝 숨어서 보고, 행정사무실에 들러서 두 아이 모두 조금 늦기는 했지만 교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아이들 등교 이야기를 전했더니 큰일 날뻔했다며 당분간 특별한 일도 없고 아내가 일을 시작하는 다음날부터 출근을 조금 이른 시간에 하게 되었으니 아침 일찍 아내를 직장에 출근시켜준 후에 돌아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고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민 초기에 나는 오픈 비자가 아니라서 취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 6개월 기간 동안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그 후 1년 동안은 인근 대학에서 진행하는 ESL공부를 하면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일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을테니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앞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장담을 했다. 아들과 조카가 처음 타본 버스에서 실수를 통해 직접 겪어보았으니 그만큼 머리에 각인된 것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3시경이 되어서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아들과 조카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두대가 지나도록 두 녀석이 내리지를 않는 바람에 다시 학교로 찾으러 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 집 뒤쪽에 있는 잔디밭으로 아이들 한 무리가 걸어오는데 아들과 조카가 그 속에 웃는 얼굴로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녀석은 아직 영어로 대화가 쉽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면서 환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침에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만 봤던 일을 함구한 채 두 녀석에게 오늘 학교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더니 마치 무슨 대단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처럼 큰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 말로는 아빠가 알려주신 대로 트랜짓 센터에서 첫 번째 304번 버스에서 내리려 할 때 트랜짓센터 입구 쪽에 45번 버스가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와서 지켜보고 있는데 버스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스가 서자마자 차 안에서 눈도장을 찍어 놓았던 위쪽에 45번 버스가 서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차를 타고 사촌 형도 함께 타는 것까지 잘 확인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또래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정류장이 학교라는 것만 생각하고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벨을 누르고 기다렸는데, 막상 버스 운전기사가 세운 정류장에는 학교가 아닌 상가 앞에 세워줘서 두 아이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여기 Louis St. Laurent Junior high school 앞이냐고 물었더니 기사 아저씨가 천천히 말하면서 손으로 방향까지 가리키며 "너희는 버스를 잘못 탔다. 길 건너가서 아무 버스나 타라. 거기는 모든 버스가 트랜짓 센터로 간다. 버스에서 내리면 남쪽에 있는 45번 정거장에서 반드시 남쪽으로 가는 45번을 타야 학교에 도착할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운전기사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길을 건너서 다시 버스를 타고 트랜짓 센터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좀 전에 달려가서 탔던 북쪽이 아닌 남쪽에 위치한 45번 정거장 표시를 확인하고 45번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잘 도착을 해서 수업시간에 많이 늦지 않게 들어갔다며 두 녀석이 자랑처럼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는 내가 애간장을 태우며 여기저기 뛰어다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나도 함께 웃어 주면서 잘했다고 그렇게 하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칭찬을 해주면서 45번 버스 정류장이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두 군데 푯말이 서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 주지 못해서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더니 둘 다 304번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서있는 45번을 탓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거라며 나에게 자기들이 실수를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주는 것을 보고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튼은 버스비를 돈이나 티켓으로 내면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종이로 만들어진 시간이 적힌 작은 버스표를 끊어준다. 그 버스표에는 시간이 적혀 있는데 버스 탑승후 시간으로부터 1시간 30분 정도 지난 시간이 적힌 버스표를 끊어 준다. 그러면 해당하는 그 시간까지 버스나 전철을 몇 차례든  ETS (Edmonton Transit System)로 환승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잠시동안 버스를 잘못 탔어도 처음 탔던 버스에서 받았던 버스표만 가지고 몇 차례나 갈아탈 수 있었던 것이다.

날짜와 요일 시간이 적혀 있는 ETS 버스표

내가 트랜짓 센터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애태우던 이야기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1년 후에 새롭게 마련한 집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두 녀석 모두 중학교를 옮기게 되어서 첫 등교의 추억이 있던 Louis St. Laurent Junior high school에서 졸업까지 하진 않았지만 새로 전학을 하고 다닌 학교에서도 잘 적응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이런저런 운동부 활동과 음악시간을 통한 밴드 활동도 즐기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조카는 중학교 3년간의 기간을 마친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에 다닐 때에는 이곳에서 배운 영어를 토대로 학원에서 나름 영어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녔고 지금은 군대도 다녀와서 다시 복학하여 졸업을 바로 앞두고 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캐나다에서 직장을 잡고 사회인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사촌지간인 두 아이가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많이 되기도 했지만 아내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적응을 잘하고 친구도 사귀고 학교생활에서 여러 가지를 체험하며 짧은 시간이었던 3년의 중학생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면서 인생의 밑거름이 되는 자양분을 만들어 가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잘할 수 있고 또 잘 해낸다.



작가의 이전글 펜데믹에 에드먼튼 구경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